설 연휴에 정치 토론 프로를 우연히 봤다. 마침 공방이 격화되는 시점이었나보다. 한 토론자가 열변을 토했는데 상대 패널은 감정적이라고 일축했다. 논리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렇게 들리진 않았는데 반론하기 어려웠나 싶었다. ‘감정적’이라는 언사는 이처럼 ‘논리’와는 반대되는 뜻으로 동원되곤 한다. 하지만 감정과 논리는 그렇게 구별되는 개념이 아니다. 정치의 영역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어떤 정책도 대중의 감정에 우선 어필하지 않으면 실정적인 힘을 발휘할 수 없다. 현실정치의 이권은 감정과 논리를 매개하는 설득의 기술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감정에 호소하는 정치의 확산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그러한 정치가 인간의 어떠한 마음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일본의 정치학자 시라이 사토시는 ‘악감정에 의거한 정치’의 출현을 문제 삼은 적이 있다. 인간에겐 누군가를 돕거나 아껴주고 싶은 좋은 마음이 있는 반면, 타인을 질시하거나 미워하는 나쁜 감정도 있기 마련이다. 이때 좋은 마음의 확산을 지지하고 나쁜 감정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보통의 상식일 텐데, 이와는 반대로 흐르는 경향이 사회를 지배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서는 자기의 피폐한 처지를 납득하기 위해 원망할 상대를 찾아 나설 뿐이다. 공감하기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배타적 입장을 자명하게 수용하고, 의견이나 생각이 다른 차원의 지평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기보다는 감정적으로 멀리하는 태도가 팽배한다.
지금의 한국 사회가 꼭 그런 것 같다. 가령 여성가족부를 폐지하자는 의견이 있다. 남초 커뮤니티에서 언제든 쉽게 볼 수 있는 주장이다. 양성평등을 추구하는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명목이지만 내용의 실상은 다르다. 구체적인 분석에 입각해 있기보다는 그저 청년 남성들에게 돌아가야 할 사회의 몫이 여성가족부에 의해 빼앗기고 있다는 추상적인 피해의식의 확산일 뿐이다. 물론 국가 기구나 정부 부처 등의 형평성을 따질 수는 있다. 그러나 형평에 맞지 않아 보인다고 해서, 없애버리면 된다는 식의 해결이 전부일 순 없다. 적어도 제대로 된 정치라면 무언가로부터 소외되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처지를 객관적인 지표를 통해 파악하고, 이를 살피기 위한 정책적 대안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정치란 무언가를 빼앗을 수도 무언가를 나눌 수도 있게 한다. 과연 오늘의 정치는 어떤 감정에 의거하고 있나?
지역감정을 조장하고 계급 갈등을 부추기는 정치의 폐단을 우리는 오래도록 지켜봐 왔다. 그러다 이제는 세대로, 성별로 갈라치기 하는 정치가 다시금 부상하고 있다. 권력 쟁취와 유지를 위해 사람들의 악감정에 어디까지 편승해갈지 모르겠다. 이번 서부지법 폭동 사태도 우연이 아니다. 사법 체계와 헌정질서의 근간을 위협하는 집단적 폭력행사에 엄정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도 부족할 판에 그들의 삐뚤어진 감정을 이용하려는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라. 시라이 사토시는 ‘악감정에 의거한 정치’란 ‘파시즘’에 다름 아니라고 정의했다. 정확한 진단이라 생각한다. 역사의 문전 앞에 당도한 파시즘에 저항해야 한다. 부디 혼란스러운 최근의 정세를 계기로 한국의 정치가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나약한 본성’으로부터 빠져나오길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