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리뷰 대구 봉산문화회관 유리상자-아트스타 Ⅰ 윤영화전 -‘유산-항해’3월 30일까지<br/>배와 빛, 영상 속 ‘숲·바다·파도·석양’, 고서, 소금은 삶이 배태한 것<br/>종교와 철학을 아우르며 인류사 관통… 오브제들 작가의 내적 표상
대구 봉산문화회관의 대표적 기획전시인 ‘유리상자-아트스타’의 올해 첫 번째 전시인 윤영화(61·고신대 교수) 작가의 ‘유산-항해’전이 오는 3월 30일까지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질문과 삶의 항해를 탐구하는 주제로, 윤영화 작가는 회화와 설치를 바탕으로 영상, 퍼포먼스 등 다양한 예술적 언어를 결합해 독특한 예술 세계를 펼쳐 보인다.
2008년부터 이어져 온 ‘유리상자-아트스타’ 전시 공모 선정작가전은 동시대 예술의 새로운 시각과 담론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전시는 봉산문화회관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공간인 유리상자(아트스페이스)에서 펼쳐진다. 사면이 유리로 이뤄진 유리상자는 미술관의 화이트 큐브와 같이 폐쇄적인 공간이 아니라 외부에서 내부가 들여다보이는 구조로서, 관람객에게 열려있는 생활 속 예술공간이다.
‘유리상자-아트스타’는 이러한 공간적 특성을 활용해 현대미술의 다양성을 담고자 기획된 전시공모 프로그램으로서, 작품 형태와 형식에 있어 제한과 한계를 넘을 수 있도록 작가의 도전 정신을 북돋아 실험적인 미술작품을 창작하는 공간의 창조적 역할을 담당하고자 한다.
이번 전시에서 윤영화 작가는 인간과 사물의 생과 사멸의 흔적을 의미하는 ‘유산(遺産)’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아내는 빛-영상 설치 작업과 이를 신체적 행위로 완성하는 퍼포먼스를 구상했다. 작가는 유리상자 공간을 캔버스로 생각하며 설치 기간 동안 붓으로 그림을 하나하나 그려가듯 요소들을 가감하고 조율해 나가는 한편, 장시간에 걸친 공간과의 소통을 통해 그 안에서 변화하는 예술적 형상을 쌓아가며 마침내 현재의 작품을 완성했다.
전시 공간 중앙에는 빛을 아래로 품고 있는 태운 나무배 구조물이 자리하고 있다. 뒷면의 높은 벽에는 파도가 치는 바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등 작가가 일상에서 채집한 풍경들이 편집된 영상이 펼쳐진다. 바닥에는 소금이 가득한데, 파도의 포말이 모여있는 것 같기도 하고 눈이 쌓인 모습 같기도 하다. 목발에 붕대를 감아 만든 노(櫓)와 인류가 쌓은 지식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 책들은 소금에 덮여 드러나 있기도, 숨어 있기도 하다. 성소(聖所)를 의미하는 ‘SANCTUM’이라는 단어는 하얀 소금 위에서 붉게 빛나고 있다.
‘유산-항해’는 운명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와 너, 우리가 삶에서 짊어져야 할 과거, 살아가고 있는 현재, 그리고 나아가야 할 미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작가는 ‘확신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가 무엇을 믿을 수 있을까?’, ‘과연 영원한 것은 존재할까?’라는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대한 답, 그리고 그것을 모색하는 과정에서의 삶의 좌표들을 설치와 퍼포먼스를 통해 관객과 공유하고자 한다.
20여 년간 바다를 가까이 두고 살아온 작가는 배와 소금처럼 자신의 삶에서 파생된 소재들을 예술적 매체로 변환시키며 삶을 은유하는 방법으로 지향점들을 표현하고 있다. 배는 바다의 무수한 파도를 몸으로 부딪쳐 싸워가며 긴 항해의 시간을 버텨내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다. 우리의 인생도 이 세상의 무수한 파도 같은 역경들을 이겨내는 항해와 유사하다. 작가의 작업은 그 자신을 내던져 실존적 의미를 찾는 여정이며,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역경을 넘어 희망의 세계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표현한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인생을 항해하고, 무엇을 남길 것인지 질문을 던지며 이를 생각해 보게 한다.
윤영화 작가는 서울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제8대학교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BFA~MFA)를 취득했으며, 파리 팡테옹-소르본느 제1대학교에서 조형예술학과 심화 연구 학위 과정(DEA)을 마쳤다. 1990년대 후반 파리에서 유학하던 시절, 그는 포스트모던 미학자 장 보드리야르와 신학자 마틴 부버의 저서를 통해 예술과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깊이 있게 탐구했다. 2002년 귀국한 이후에도 지속적인 자기 성찰과 수련을 통해 예술적 진정성을 추구해 왔으며, 이번 유리상자전에 전시된 작품 ‘유산(遺産)-항해2025’ 역시 그의 철학적 명제들을 반영하고 있다.
작품을 구성하는 배(Boat)와 빛(LED), 영상(숲·바다·파도·석양), 고서(古書), 소금은 삶이 배태한 것으로 종교와 철학을 아우르며 인류사를 관통한다. 삶의 시·공간적 좌표가 돼줄 이 오브제들은 작가의 내적 표상이기도 하다. 이번 작품 ‘유산(遺産)-항해2025’에서도 인간이 남긴 생사(生死)의 흔적인 ‘유산(遺産)’을 은유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