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폐지

등록일 2025-01-20 18:38 게재일 2025-01-21 16면
스크랩버튼
김경아 작가
김경아 작가

태풍경보가 내렸다. 비바람이 다짜고짜 해송의 멱살을 흔들어 댄다. 해송은 흔들리면서 힘겹게 버틴다. 수평선 너머에서 시커먼 너울들이 거침없이 다가온다. 오늘 밤이면 방파제를 훌쩍 뛰어넘은 파도가 배들을 다 삼켜버리겠다. 바닷가로 이사 온 이후로 처음 보는 광경이다.

포구는 전쟁 전야처럼 긴장감이 가득하다. 밀려올 파도에 대비하는 뱃사람들의 몸짓이 분주하다. 배를 계류하기 위해 위치를 옮기고 배마다 육상 비트에 홋줄을 건다.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지 배와 배가 서로 부딪치지 않도록 밧줄로 팽팽히 묶어 스크럼을 짠다. 풍랑이 몰아치면 줄은 배들이 서로를 지탱해 주는 힘이 된다.

홋줄은 굵은 밧줄이다. 성인 남자의 팔뚝만큼 두껍고 길이도 길다. 작은 배는 혼자서도 줄을 걸 수 있지만 큰 배는 어림도 없다. 그러므로 윈치라는 기계를 이용하여 홋줄을 당긴다. 홋줄에 묶이면 배는 고정이 된다. 누군가가 풀어주지 않으면 배는 아무리 요동쳐도 바다로 떠나지 못한다.

더 넓은 바다로 떠나야 할 엄마는 집에 묶여버렸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생계는 외할머니가 떠맡았고 외할머니가 생선을 팔러 나가면 집안일은 모두 엄마가 떠맡았다. 밤이 이슥해지면 잠투정하는 동생들을 다독거리느라 토막잠을 잤다. 입 하나를 덜기 위해 외할머니는 엄마를 시집보냈다. 시집은 친정보다 형편이 조금 나아서 춘궁기에도 배는 곯지 않았고 가끔 웃을 일도 생겼다. 그러나 아버지가 폐결핵에 걸리면서 엄마의 삶은 또 발목이 잡혀 버렸다.

아버지의 병은 외할머니에게 쓰나미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소식이었다.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일만 시키다 어렵사리 시집보냈는데, 또 병 치다꺼리라니, 딸에게 당신의 삶을 고스란히 이어주었다고 생각한 할머니는 깊은 시름에 들었다. 마음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던지 할머니는 정신줄까지 모조리 놓아 버렸다. 그때부터 할머니의 삶은 항해가 아니라 표류였다.

할머니는 밤이면 귀신이 보인다고 울었다. 자다 말고 쫓아간 엄마에게 할머니는 매질을 했다. 심한 욕설도 내뱉었다. 가족의 생계도 고스란히 엄마에게 맡겨졌다. 종일 생선과 씨름하느라 몸에는 비린내가 가실 날이 없었다. 장사를 마치고 돌아오면 집안 곳곳에 일이 널브러져 있었다. 방으로 부엌으로 빨래터로 분주히 몸을 놀리다 보면 밤이 이슥해졌다. 서른도 안 된 엄마의 고운 손은 점점 지문이 닳고 닳아 거칠고 투박해졌다.

엄마를 옭아매는 줄은 하나가 아니었다. 깜깜한 골목길을 들어서면 울고 있는 자식들, 뼈만 앙상히 남은 채 피를 토하며 기침만 해대는 남편, 벽이며 바닥이며 마루며 온 집안을 배설물로 칠하는 할머니, 발목, 허리, 손목에 줄이 매어져 있었다.

엄마도 꽃이 피는 봄날이면 치맛자락 펄럭이며 꽃구경도 가고 싶었고 지천이 울긋불긋 물들어 가는 가을이면 생선 좌판 걷고 단풍을 보러 떠나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 하루 놀고 나면 내일 끼니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에 마음을 고쳐먹었을 것이다.

엄마에게 이어지는 줄은 동아줄보다 질겼다.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는 줄이었다. 암담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줄을 끊고 도망이라도 가고 싶었겠지만, 그렇다고 인연의 줄까지 끊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남편과 며느리라는 줄은 경우에 따라 끊을 수 있지만 자식과 연결된 줄은 누구도 끊을 수 없었다.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먼 길로 떠나셨다. 엄마를 옭아맨 홋줄이 하나씩 끊어지면서 엄마는 자유를 조금이나마 찾았다. 그러나 꽃다운 나날이 이울어버린 뒤였다. 게다가 자식들을 더 보듬어야 했다. 엄마는 더 넓은 바다로 떠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항구가 되었다. 제 마음대로 움직였던 몸의 지체 하나하나가 또 발을 묶었다.

자식들이 성장해 하나씩 항구를 떠났다. 그렇다고 엄마는 쉬지 않는다. 집을 떠난 자식들이 가끔 돌아와 쉬었다 갈 때 바리바리 내어준다. 밥을 먹고 돌아서도 ‘밥 먹을래’하고 묻는다. 인연의 끈이 손주까지 이어져 챙길 입이 많아졌다. 그래도 그것을 천륜의 줄이라 여기고 늘 몸을 놀리지 않는다. 엄마와 나는 탯줄로 이어졌다. 뱃속에서 나와 탯줄이 끊어지면서 핏줄이 되고 그때부터 생긴 인연의 줄이 엄마와 나를 잇고 있다. 엄마라는 항구를 떠난 지 오래지만, 엄마는 이제 휴대폰을 통해 문자를 보내온다. 밥 묵었나, 아픈 데 없나. 엄마는 스스로 자식과 홋줄을 묶는다. / 작가

김경아의 푸른 돋보기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