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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하지(夏至)를 보내며

등록일 2024-06-23 19:56 게재일 2024-06-24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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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해마다 6월 20일이면 어김없이 서울로 방향을 잡는다. 벌서 3년째 그렇다. 어머니 기일이 6월 20일이다. 어머니 살아생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기일은 음력으로 정했으나, 날짜가 들쭉날쭉해서 어머니 기일은 양력으로 하기로 했다. 왕복 640km의 여정을 1박 2일에 진행해야 하기에 어느 땐 다소 고단하기도 하다. 무더위가 일찍 찾아든 올해가 그런 형국이다.

21일 오후 햇살이 뜨겁게 내리비치는 마당에 들어오려니 잔디와 텃밭의 채소가 물을 갈구하는 듯하다. 이틀 전에 1시간 넘게 물을 듬뿍 주었으나, 땡볕과 바람으로 모두 날아가 버린 모양이다. 일기예보가 내일 오전부터 강우를 알리고 있어서 물 주기는 일단 넘어가기로 한다. 이른 저녁을 마치고 부엌 창문 너머 동녘 하늘을 보노라니 붉은 보름달이 떠오른다.

달력을 보다가 아하,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 기일이 보름이었다. 그러니까 6월 21일은 2024년 하지이며 동시에 열엿샛날인 셈이다. 여름의 절정인 하지와 둥근 달이 떠오르는 시기가 교묘하게 겹치는 현상이 일어난 게다. 평상시와 달리 상당히 붉게 떠오른 달에서 어떤 상서로움과 기이한 천문현상을 확인함은 실로 경이로운 일이다.

언제부턴가 인간은 경이(驚異)로움과 경탄(驚歎)의 마음을 상실했다. 자연과학과 기술의 현저한 발달이 불러온 심각한 부작용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일상에 견고하게 자리하기 시작한 무한반복의 타성은 생의 건조함과 무의미성을 강화했다. 낯선 풍경과 사람과 인연이 매개하는 경탄과 경이의 순간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기계화된 회색의 일상이 들어선 것이다.

살아가면서 무엇엔가에 놀라고 흥분하고 가슴 설레는 경험이 없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 기막힌 순간들이 현대인들과 영원히 작별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날이 그날처럼 여겨지는, 따라서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인 나날들이 꾸역꾸역 채워져 1년 365일의 시간이 사라지는 양상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 인간들에게 작은 축복처럼 다가온 것이 이번 하짓날에 떠오른 붉은 달이다. 한두 시간 지나면 평상시처럼 하얀색으로 변모할 것이지만, 하늘을 올려다본 사람에게는 신비로움을 선사하기 충분하다. 하지만 현대인은 하늘을 보지 않으며, 특히 도회에 사는 사람은 24시간 환한 환경 때문에 달과 별을 마주할 계기가 없지 않은가?!

잠시 담장 밖으로 나가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포장된 거리를 걷다가 하루살이와 모기 등쌀에 쫓기듯 돌아온다. 긴 한숨을 내쉬면서 ‘하짓날인데, 어떤 정취(情趣)도 없다니….’ 하며 혼자 혀를 끌끌 찬다. 1년의 절반 이상이 사라지는 시점에 앞으로 남은 시간을 생각한다. 지난 6개월을 뭣하며 살아온 것일까, 돌이키니 웃음과 함께 아쉬움도 손짓한다.

작년 하짓날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돌이키니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때도 분명 무엇인가 아쉽고 그립고 안타까운 것이 있었을 터! 이런 소소한 삶을 풍성하게 해줄 경이로움과 경탄의 순간들을 만들어야 하겠다는 작은 다짐을 하면서 2024년 붉은 달의 하짓날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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