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중순 몇몇 교수가 우리 집을 찾아 차를 마시며 한가로이 봄날 하오를 보냈다. 일행은 여기 머물지 아니하고 장소를 ‘각북’으로 옮긴다. 그곳은 작년 가을 대구에서 옮겨온 동료 교수가 새로이 터전을 마련한 멋진 장소였다. 바깥 공간은 입체적으로 꾸며져 아기자기하고 오밀조밀했으며, 흙벽돌로 가꾸어진 내부공간은 소담하고 단아했다.
저녁놀이 질 무렵 기타 반주에 노래 몇 곡 하고 인근 식당으로 이동한다. 그 자리에서 누군가 다음 달, 그러니까 신록과 녹음의 5월 구룡포 1박을 말하는 것이다.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구룡포에서 멀지 않은 포항 남구에 아담한 집을 가진 친구가 저녁 식사를 제공하겠다고 한다. 이렇게 1박 2일의 짧은 여행 계획이 속성으로 만들어졌다.
요즘 주말이면 찾아오곤 하는 비바람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지난 금요일 하늘은 참으로 맑고 투명했다. 멀리 수평선 너머 포항제철의 굴뚝과 거대 콘크리트 건물이 붉은 저녁놀 속으로 하나둘씩 사라지고, 옥상에는 은성(殷盛)한 식탁과 환한 얼굴들과 약간의 열기로 달궈진 목소리가 허공을 날아다닌다. 그렇게 포항의 일몰과 초승달과 웃음이 엇갈린다.
나는 기타 연주와 노래로 좌중의 흥을 돋운다. 이번에는 각자가 부를 노래를 미리 신청받았기로, 한 곡씩 순서대로 반주를 시작한다. 누군가는 소월의 시를 노래로 만든 ‘실버들’을 부르고, 또 다른 이는 최진희의 진한 음색으로 넘쳐나는 ‘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를 열창한다. 그렇게 ‘베사메 무초’와 ‘봄날은 간다’, ‘그때 그 사람’이 차례로 불려 나온다.
여러 생선이 어우러진 회와 삼겹살이 소맥과 뒤섞인다. 그렇게 초저녁이 야음으로 질주하고, 웃음판도 커간다. 초면인 사람들도 허심탄회하게 어우러지는 열린 유희의 마당은 얼마나 우리의 팍팍한 삶을 풍요롭게 하는가?! 크고 작은 일상사와 잔잔한 걱정거리와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일순(一瞬) 밤의 대기 속으로 흩어져버린다.
인생이란 항해 과정에서 우리는 지나치게 가슴 졸이고, 넘치도록 근심 걱정에 시달리고 있지 않은가. 영원히 사라져버린 과거의 아픈 기억에 매달려 자학하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걱정거리를 느닷없이 소환하며 살지 않는가 말이다. 그러다 거울을 보다가 화들짝 놀라 뒷걸음치는 것이다. 저 얼굴이 분명 내 얼굴인가, 하는 장탄식의 순간!
짧은 여행이 우리에게 필요한 까닭은 이것이다. 좀처럼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 그래서 한사코 떨어지지 않는 소소한 생활상의 문제와 작별하고 상실의 감정을 생생하게 되살리려는 것이다. 격의 없는 대화와 환한 웃음과 열렬한 가창과 자연스러운 앙천(仰天)이 선사하는 가벼운 일탈의 환희가 우리를 축복하고 격려하며 다시 나아가라고 귓속말한다.
다시 밝아온 구룡포 앞바다에 붉은 해가 장쾌하게 얼굴을 내밀고, 우리는 다시 바다와 작별한 채 도회로 귀환한다. 다소 지친 몸과 마음을 동반하되, 뭔가 많은 것을 비우고 버렸다는 홀가분함을 벗으로 삼고 단단한 일상과 재회한다. 짧은 여행의 선물에 감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