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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나무에 재미가 열리고

등록일 2023-04-05 17:03 게재일 2023-04-06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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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태순수필가
양태순 수필가

텃밭에 갔다. 겨울 동안 뜸했던 발길에 밭이 엉망이다. 펄럭이는 비닐 쪼가리와 도착지를 잃은 종이와 떠나기 싫어 뭉그적거린 낙엽이 바람에 휩쓸려 수없이 굴러다닌 자국이 지천이었다. 가져온 커피를 홀짝이며 혼자서 적적했을 밭에게 무심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옷을 갈아입고 호미를 들었다. 쓰레기라는 이름으로 묶인 것을 긁어모으니 큰 더미가 되었다. 나중에 분류를 해야겠지만 우선은 모아 두고 흙을 살폈다. 호미질을 해보니 흙이 부슬부슬하다. 아마도 얼었던 흙이 봄기운을 받아 살을 풀어헤치고 있었던가 보다. 무너진 두둑을 새로 흙을 돋우어 다듬고 물고랑을 만들고 흙 뒤집기를 했다. 손바닥만 한 텃밭이라 한나절 호미질로 그럭저럭 태가 났다. 다음 주에 상추를 비롯한 채소를 심기로 하고 호미를 놓았다.

봄나물을 캐러 들에 갔다. 밭이 많아서 냉이나 달래, 쑥이 있을 것 같아 조금만 캐서 봄을 먹으리라 생각했다. 밭둑을 살피며 쭉 갔는데 냉이만 보였다. 시력이 나쁜지 봄나물이 살길을 찾아 숨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봉지 안에 든 냉이가 한 끼는 될 것 같아 그만하고 들녘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묵정밭 둑에 두어 그루 나무에 튀밥 같은 꽃이 피어 있었다. 벌들이 잉잉 꿀을 빨고 있다. 꽃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나는 무슨 꽃인지 몰라 곁에 있던 이에게 물었다. 살구꽃이란다. 살구꽃, 입 안을 맴도는 아릿한 향기가 찌르르 운다.

어릴 적, 살구나무는 친구였다. 흔히 마당 귀퉁이나 대문 주위에 있었건만 친구집 살구나무는 대밭에 있었다. 시누대로 울을 겸한 것인데 중간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앞에는 배꼽마당이 있어 우리는 자주 나무에 오르곤 했다. 좁은 마당에서 숨바꼭질, 딱지치기가 지루해지면 나무에 매달려 시시거리며 놀았다. 살구를 따준다, 매미를 잡는다, 너보다 높은데 올랐다는 둥 갖가지 이유로 나무를 오르내렸다. 나무와 어울려 노는 어린 날은 여물어갔고 나무는 쑥쑥 품을 넓혔다.

그런 어느 날, 나는 나무에서 미끄러져 발바닥이 대꼬챙이에 찔렸다. 이쑤시개만 한 것이 살에 박혔다. 절름거리면서도 야단맞을까 두려워 울지도 못했다. 부모님은 꾸중 한마디하고 의사에게 데려갔다. 의사 앞에서 나는 아프다는 핑계로 엉엉 울었다. 내게만 이런 일이 생긴 것이 서러웠기 때문이다. 얼마 후에 이사를 했고 그곳에는 살구나무가 없었다. 그렇게 살구나무는 내 놀이 테두리 밖으로 밀려났고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

그 살구나무는 어땠을까. 우리가 수피가 맨들맨들하도록 못살게 구는 것이 싫었을까, 찾아와서 놀아주는 것이 좋았을까. 우리 때문에 괴로웠다면 시들시들했을 텐데. 매해 잎을 무성하게 피우고 튼실한 열매를 맺은 것으로 보아 우리의 웃음소리와 재잘거림이 반가웠던 듯싶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눈앞의 살구나무를 들여다본다. 가지마다 매달린 옅은 분홍 꽃이 보러 와 달라 부르는 손짓 같다. 나무를 만지며 손끝에 감각을 모은다. 우둘투둘 무늬가 꿈틀거린다. 꽃과 잎을 통해 자유로이 숨을 쉬던 통로를 일제히 오므리고 한겨울 추위를 막아내던 자리, 두꺼운 껍질도 끝내 견디지 못하고 거칠게 갈라졌던 흔적이다. 온몸으로 겨울을 건너 봄을 피웠다. 홀로 거친 시간을 견뎌내고 이토록 환하게 웃어주니 애썼다, 꼬옥 안아주고 싶다.

사람도 혼자 걸어가야 하는 삶이고 나무도 홀로 커가는 생이다. 그렇더라도 가끔은 넘어졌을 때 일으켜주는 손이 의지가 되듯이 숲에 사는 나무는 뿌리나 가지, 잎이 알게 모르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외진 곳에 터를 잡은 나무는 바람도 우박도 빗줄기도 고스란히 혼자의 몫이다. 살구나무가 만개한 꽃으로 가지를 살랑거리는데 짠한 마음이 든다. 나무가 쓸쓸해서 더욱 열심히 꽃을 빚었을까 싶어서, 한때 나무를 찾았던 소년 소녀를 기다렸을까 싶어서.

먼 기억 속에 머물러 있는 살구나무를 불러온다. 너를 생각하면 가지마다 조롱박처럼 열렸던 친구들의 얼굴과 재미를 찾아 못살게 굴었던 어린 날의 시간이 참 그립다. 내 마음 깊은 곳에는 행복했던 시절이 살구나무에 재미나게 매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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