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이후 마음의 양식이 될 책 2권
떨어져 지내던 식구들이 오랜만에 만나 쌓였던 그리움을 잠시나마 풀 수 있었던 설 연휴가 눈 깜짝할 사이 훌쩍 지나갔다.
집집마다 정성스레 준비한 명절 음식으로 한잔 술을 나누거나, “올해는 좋은 일 많이 생기고, 무엇보다 건강하길 빈다”는 덕담이 무시로 오갔을 게 분명하다. 또한, 넉넉한 고향의 품 안에서 몸을 살찌우는 며칠이었을 터.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으니 또 하루하루 부지런히 살아낼 일이 남았다. 이렇게 삶은 이어지고 지속된다. 그 일상과 삶에서 마음을 살찌울 책 2권을 소개한다. 이번 주말엔 ‘한겨울의 독서’가 지니는 매력에 빠져보시기를.
‘블루 플라크, 스물세 번의 노크’
김종관·송정임 부부의 잊고 살았던 꿈과 지향을 돌려준 예술가와 철학자들에게 바치는 헌사
‘그린 핑거’
생의 중요한 문제들, 혹은 쉽사리 해답을 찾기 힘든 고독과 사랑에 대한 진지한 문학적 탐구
▲런던의 ‘푸른 명판’ 달린 집들 - ‘블루 플라크, 스물세 번의 노크’
생면부지의 낯선 땅에서 전혀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과 인생의 3분의1 이상을 살아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만약 그 체험을 허술하게 책으로 엮어낸다면 ‘막막한 방랑의 기록’ 혹은, ‘견딤과 닳아짐의 일기’ 정도로 전락하기 십상일 듯하다.
어디서나 흔하게 접하게 되는 여행기와 해외체류기. 그것들이 위에서 언급한 막막한 기록 또는, 견딤의 일기에서 그치지 않으려면 독자가 무릎을 칠 무언가를 담아내야 한다.
그러나,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다음에 소개하는 한 권의 체류기는 제목에서부터 눈길을 사로잡는다. ‘블루 플라크, 스물세 번의 노크’.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록밴드에서 베이스 기타를 연주하던 김종관과 미술대학 시절 꿈꾼 삶과는 전혀 다른 현실을 살아야 했던 송정임. 둘은 부부다. 한국에서의 삶에 지쳐 그저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던 청춘들. 영국 런던행은 별다른 사전준비 없이 불쑥 결정된 것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도시가 마냥 행복한 공간만일 수는 없었다. 외국에서도 ‘생활’이란 두렵고도 엄혹한 단어다.
우울을 부르는 흐린 날씨와 눅눅한 안개. 거기에 원활하지 못한 의사소통 탓에 애도 먹었을 터. 하지만, 두 사람은 결국 나머지 인생을 결정할 지향과 꿈을 거기에서 찾는다. ‘런던 지하철 테러’ 등의 몇몇 드라마틱한 에피소드를 겪으며.
‘블루 플라크, 스물세 번의 노크’는 김종관과 송정임에게 한국에서 잊고 살았던 꿈과 지향을 돌려준 예술가와 철학자들에게 바치는 헌사로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블루 플라크(BLUE PLAQUE)란 뭘까? 이름 그대로다. 푸른 명판.
영국은 유명 예술가와 사상가 등이 살았던 집에 푸른 명판을 붙여 그들의 삶을 기억하고자 하는 나라다. 영국왕립예술협회와 런던시의회를 거쳐 지금은 잉글리시 헤리티지가 관리하는 푸른 명판을 단 집은 현재 런던에 880여 채.
블루 플라크에 이름을 새긴 이들은 저명한 시인 바이런에서부터 록그룹 ‘퀸’의 보컬리스트 프레디 머큐리, ‘드라큘라’의 작가 브램 스토커와 독일 철학자 칼 마르크스까지 그 프리즘도 다양하다.
김종관과 송정임은 런던에 머물던 12년 동안 이들 블루 플라크가 붙은 집 스물세 곳을 찾아다니며, 때론 마음 속 깊은 위안을 얻고 때로는 절망에서 일어서는 용기를 배운다. 그것들은 고스란히 생을 살아낼 에너지로 전환돼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도 부부를 북돋우고 있다.
책은 그들이 푸른 명판 단 집을 찾아다닌 단순한 기록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들 부부는 록밴드 연주자와 화가라는 그들의 정체성을 100% 발휘해 책을 꾸몄다.
책 곳곳을 장식한 송정임의 그림은 런던의 골목길을 실제로 걷는 듯한 느낌을 독자에게 선물한다. 푸른 명판을 헌정 받은 음악가들에 관한 김종관의 설명은 명확하면서 동시에 시적이다. 게다가 ‘블루 플라크, 스물세 번의 노크’의 문장은 기성작가 못지않게 단단하다. 이런 대목들이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버스를 타지 않고, 찰스 디킨스의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그 길에서 한동안 읊조리지 않았던 그 강렬한 ‘황폐한 집’의 첫 장을 다시 한 번 외워보았다.’
-책 54페이지.
‘어쩌면 지미 핸드릭스는 나 같은 수많은 먼지들이 만들어낸 욕망의 실체이고, 그들이 완성해내지 못한 꿈들의 고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수많은 먼지들이 그의 빛을 바라보는 동안 그는 차가운 암흑 속에서 언제나 홀로 외로이 빛나는 존재였다.’
-책 208페이지.
30대를 온전히 영국 런던에서 보낸 부부가 만난 23명의 예술가들. 버지니아 울프, 찰스 디킨스, 딜런 토머스, D.H. 로렌스, 존 레넌, 토머스 하디, 애거서 크리스티….
김종관과 송정임은 그들의 삶과 예술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무엇을 보았기에 “인생을 멋지게 만들 수 있는 단서들을 블루 플라크가 붙은 집이 있는 런던 골목길에서 주워 모았다”고 고백했을까? 그게 궁금한 독자는 책을 집어 드는 수밖에.
▲빼어난 전략만으로 사랑과 연애가 가능할까?- ‘그린 핑거’
인간이 저마다의 가슴 안에 얼마만한 고독을 지니고 살아가는지, 그 고독이 발원한 지점이 어디인지를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이들은 드물다. 우리들 모두가 철학자나 현자(賢者)일 수는 없으니. 그러나, 대충 이런 대답 정도는 내놓을 수 있지 않을까.
“고독? 견디기 힘든 외로움과 슬픔은 사랑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소설집 ‘그린 핑거’는 1998년 창비 신인소설상을 받으며 등단해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과 인간에 관한 문학 탐구를 지속해온 작가 김윤영이 ‘루이뷔똥’, ‘타잔’에 이어 3번째로 상재한 책.
기자가 읽어본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그린 핑거’는 앞에서 언급한 생의 중요한 문제들, 하지만 쉽사리 해답을 찾기 힘든 고독과 사랑에 대한 진지한 문학적 탐구로 보인다.
굵직한 이 두 단어 아래 열등감과 연애, 허영과 인연, 운명과 죽음 등도 김윤영의 문학 탐구 범위에 포함됐다.
개별적 줄거리를 가지는 2개의 단편과 ‘내게 아주 특별한 연인’이란 부제를 단 5편의 연작이 실린 책에서는 젊은 감각보단 진중하고 묵직한 주제의식이 더 돋보인다. 가벼운 소설식 코드를 사용하면서도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은 결코 가볍지 않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진지함과 무거운 주제의식은 이미 전작들에서부터 김윤영 소설을 특정 짓는 가장 주요한 핵심어였다. 그래서 그녀의 소설이 딱딱하고 어렵냐고? 천만에.
진중한 주제의식에 재미를 결합해낸 소설을 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등단 이후의 시간 동안 김윤영은 이 2가지를 어색하지 않게 결합해내는 재능을 꾸준히 높여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윤영의 소설들은 독특하다. 블랑팡이나 칼라트라바와 같은 브랜드에서 학벌, 직장, 외모 등 인간의 본질을 대신하는 브랜드까지 문학적 코드와는 거리가 먼 통속적인 코드들이 넘쳐나지만 묘하게도 이 통속성은 어느 순간 당대성이라는 큰 힘을 획득한다…(후략) 그녀의 소설들은 물수제비처럼 가볍게 수면 위를 날아가지만 아주 먼 곳까지 여러 겹의 파장을 일으키며 오랫동안 흔들린다.”
이 같은 소설가 하성란의 비평에 답하듯 ‘그린 핑거’에서도 김윤영은 통속적 코드를 문학적 코드로 능수능란하게 전환시켜 독자들의 가슴 속에 울림이 큰 파장을 일으킨다. 통속성과 당대성의 경계를 허무는 ‘소설적 힘’ 역시 여전해 보인다.
언청이로 태어난 여성이 느끼는 세상에 대한 환멸을 미세한 감정 묘사로 그려낸 표제작과 중산층의 허위의식과 생에서 가장 중요한 어떤 것을 잃어버리고 사는 현대인의 피폐를 보여주는 ‘전망 좋은 집’은 나무랄 데가 별로 없는 작품.
하지만, ‘그린 핑거’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5개의 단편을 통해 사랑과 연애, 고독의 본질에 접근하려 한 작가의 노력이 돋보이는 ‘내게 아주 특별한 연인’ 연작이 아닐까 싶다.
늦은 밤. 오렌지색 조명 아래서 이 연작을 읽을라치면 “사랑은 전략이 아니다” 또는 “연애만으론 결코 고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냉혹하지만, 정직한 속삭임이 들려온다.
지금 사랑과 연애, 결혼에 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이들은 물론, 인간의 삶 속에서 이 단어들이 점하는 위치를 가늠해보고 싶은 독자들에게도 잘 어울리는 책이기에 권한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