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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연시 ‘위로와 위안의 선물’ 책 한권 어때요

홍성식기자
등록일 2022-12-27 20:01 게재일 2022-12-28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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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현자(賢者)들은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은 그 길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스스로를 책망할 건 없다. 솔직히 말하면 인터넷과 휴대폰이 장악한 지금 시대에 ‘책’에서 ‘길’을 찾는 이들이 주위에 얼마나 있겠나. 지극히 적은 숫자일 게 뻔하다. 그러나, 다시 돌아보면 책은 인간에게 위로와 위안을 선물해왔다. 아주 오랜 시간 전부터. 그것까지 부정하긴 어렵다.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던 2022년이 곧 닫히고, 이어 새로운 희망으로 맞이할 2023년이 열리는 시기다. 시끌벅적한 연말 모임도 나쁠 것 없지만, 책과 함께 조용히 새해를 설계해도 좋을 이때. 1권의 시집과 1권의 산문집, 1권의 장편소설을 독자들께 정중하게 권한다.

 

강우식 ‘살아가는 슬픔, 벽’
강우식 ‘살아가는 슬픔, 벽’

2줄 짧은 시로 세상을 해석하다

강우식 ‘살아가는 슬픔, 벽’

빼어난 시는 짧다. 이에 관해선 굳이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시가 드러내야 하는 세상과 인간의 본질이란 결국 간명한 것이니. ‘2행 시집’이란 부제가 붙은 강우식의 책이 빛나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 1941년 강우식과 같은 해에 태어난 많은 작가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 시인 조태일과 소설가 이문구 등. 그보다 아래 연배인 문학평론가 김현과 시인 이성부, 소설가 김성동도 이미 지상의 사람이 아니다.

20~30대 젊은 시인들이 문제적 작품을 들고 나오며 한국 시단의 새로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오늘. 나이를 잊고 ‘삼국지’의 노장 황충을 닮은 시적 결기를 보여주는 강우식의 작품들이 독자는 반갑다. 서시격으로 읽히는 ‘시인의 말’은 오랫동안 시를 써온 사람의 간절한 바람이 읽힌다.

‘무릎장단 저절로 쳐지는

좋은 시 한두 수쯤 있었으면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강우식의 이 책은 모두 2행짜리 단출한 시로 이뤄졌다. 19세기 중반 활동했던 프랑스 시인 로트레아몽. ‘말도로르의 노래’라는 제목의 산문시집으로 유명한 그지만, 기실 로트레아몽 최고의 절창은 2줄짜리 시 ‘나무’다.

 

‘나무는

자신의 위대함을 모른다.'

 

다시 강우식으로 돌아간다. 나이 먹어 부드러워진 눈으로 보면 세상의 질서와 이치, 사람의 도리와 본성이 명료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가을비 3’이 그렇다. 불평등에 땅을 치던 젊은이도 세월이 흘러 세상 보는 눈을 가지게 되면 마침내 이런 결론에 가닿지 않을까?

 

‘빈한하게 살아 한 생이었다고 푸념치마라

누군들 저 비울음에 젖어 목줄 떨며 안 지나

가겠는가.’

 

책에 실린 짤막한 연애시 또한 흥미롭다. 애틋하면서도 웃음을 부르는 ‘삼월이’란 작품이다.

 

‘가시내를 사랑했나봐 지금도 못 잊는 걸 보니

어릴 때 3월이 오면 기를 쓰고 놀렸던 이름

삼월이.’

책의 끝부분. 강우식은 2행의 짧은 시 작업을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촌철살인은 못되더라도 시의 군더더기 없는 맛을 나타내려고 쓴다.”

조금이라도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다. 강우식은 문단에 나온 후 20년을 4행시 작업에 매달렸다. 그리고, 다시 발견한 2행시. 시인도 그와 함께 더 가벼워지고 명료해졌다.

 

유영갑 ‘갈대 위에는 눈이 쌓이지 않는다’
유영갑 ‘갈대 위에는 눈이 쌓이지 않는다’

자연을 친구 삼아 홀로 살아내다

유영갑 ‘갈대 위에는 눈이 쌓이지 않는다’

시인에겐 세상의 진실과 인간의 본질이 길게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짧게 요약되는 게 아닐까.

‘월간문학’으로 등단해 ‘푸른 옷소매’ ‘달의 꽃’ 등을 쓴 소설가 유영갑을 여러 차례 만났다.

자기 뜻을 먼저 앞세우지 않고, 조용히 앉아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는 점잖은 사람. 동그란 낡은 안경테 뒤로 비치는 눈빛이 선하고 정 깊어 보였다. 그는 네온사인 번득이는 도시에서의 삶을 접고 고향인 시골마을 강화도로 들어가 빈 집을 수리해 산다. 이미 오래 전부터다. 바다 냄새와 쓸쓸한 하늘이 그의 친구들이다.

유영갑의 산문집 ‘갈대 위에는 눈이 쌓이지 않는다’는 정갈한 식탁과 닮은 책이다. 투박하지만 맛깔스럽다. 이 책은 나이 지긋한 사내가 유배지처럼 한적한 시골에 살며 맛보는 삶의 쓸쓸함과 달콤함, 사람살이의 고단함과 즐거움, 어릴 적 뛰놀던 고향의 풍광과 기억까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책도 사람을 닮는 것인가? ‘갈대 위에는 눈이 쌓이지 않는다’에 실린 문장들은 유영갑처럼 따뜻하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겨울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 인내와 끈기를 강요한다. 그런 점에서 이 계절은 내 삶의 어떤 부분과 닮아 있다. 하지만 나는 겨울을 좋아한다. 겪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고통이라는 불방망이에 두드려 맞을수록 내면이 단단해진다는 사실을.

-위의 책 ‘강화극장’ 중에서.

 

혼자 견뎌야 하는 차가운 겨울에도 다가올 봄의 희망을 잃지 않고, 외딴 마을 가는 길에서 만난 텅 빈 도로에서 풍선처럼 부풀어야 마땅할 생에 대한 기대를 떠올리는 사람이 바로 유영갑이다.

이 책은 훈훈한 문장 외에도 아마추어 실력을 뛰어넘는 유영갑의 사진을 보는 기쁨까지 선물한다. 그가 렌즈를 통해 본 강화도의 바다와 벌판, 그곳에 기대 삶을 이어온 사람들의 모습 역시 정겹고 따스하다.

때로는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살림살이를 한탄하고, 너무나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원망하기도 하지만, ‘강화도 사람’ 유영갑은 행복해 보인다. 왜냐? 유년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나 하나만이 아닌 ‘우리’를 위해 기쁘게 밥 한 술 덜어줄 수 있는 이웃들이 존재하는 고향에서 늙어가고 있기 때문이리라.

 

박현욱 ‘아내가 결혼했다’
박현욱 ‘아내가 결혼했다’

웃음과 씁쓸한 뒷맛을 주는 읽을거리

박현욱 ‘아내가 결혼했다’

‘일부일처제’라는 굳어진 사회 시스템을 유쾌하게 깨부수는 작가. 그걸 읽는 독자들은 재밌고도 놀랍다.

비독점적 다자연애의 결혼관을 소설적으로 풀어낸 박현욱의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는 가볍고 경쾌한 문체와 속도감 있는 전개로도 관심을 끈다.

이 작품은 평범한 회사원 덕훈과 온몸으로 자유연애를 실천하며 사는 분방하고 독특한 여자 인아의 연애담으로 시작된다. 둘의 사랑 이야기 속에 양념처럼 섞여드는 게 바로 축구.

작가는 축구를 통해 인간보편의 삶을 설명하는 독특한 방식을 구사하는데, 이를 위해 수십 권의 축구 관련 서적은 물론, 오만가지 스포츠 인터넷사이트를 섭렵한 듯하다.

현실에서의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소설 속 설정은 아슬아슬한 게임처럼 이어지고, 인아는 누구의 자식인지 확인하기 힘든 딸까지 낳는다. 묘한 건 덕훈의 태도다. 인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음에도 여전히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 이 복잡하고도 미묘한 감정 속에서 덕훈과 인아, 그녀의 딸과 두 번째 남편은 뉴질랜드로 떠나기로 합의하는데….

세상에는 우리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 곧잘 벌어지고, 이해하기 힘든 사랑의 방식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생경한 소재와 특이한 발상의 작품 ‘아내가 결혼했다’는 한국사회의 상식으로는 수긍하기 힘든 여성의 복혼(複婚)을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큰 거부감 없이 술술 읽힌다. 이는 박현욱 문장이 가진 ‘몰입의 힘’ 때문이다.

누군가는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현대사회의 가부장제를 극단적으로 묘사한 블랙 코미디로 이 소설을 읽었다고 한다. 맞다. 기자 역시 웃음 끝에 묻어나는 씁쓸한 뒷맛이 나쁘지 않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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