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함산에 깃든 신라 역사와 경주 이야기<br/> ④ 토함의 전설 담긴 영지
‘아사달이 석가탑을 완공하기를 기다리던
아사녀는 탑 그림자가 비치지 않자 못에 몸 던져
후대 사람들은 이 못을 ‘영지’라 부르고
그림자가 비치지 않은 탑을 무영탑이라 불러…’
현진건이 연재한 소설 ‘무영탑’에서 설화 유래
경주시 예산 투입 ‘영지설화공원’으로 변모
이야기 바탕 2024년까지 ‘설화체험관’ 건립
□아사달과 아사녀 슬픈 전설 깃든 영지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영지(影池)는 토함산과 관련된 곳 중 가장 풍성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림자가 비치는 연못’이라는 뜻의 영지는 불국사역 구정로터리에서 7번 국도를 타고 울산 쪽으로 가다 보면 보이는 저수지다.
예전에는 베스를 잡던 낚시터였지만 지금은 경주시가 예산을 투입해 영지설화공원으로 조성하면서 주변이 깔끔해졌다. 산책로와 어린이 놀이터가 생겼고, 2024년까지 아사달과 아사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설화체험관이 건립될 예정이라고 한다.
잘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영지 못 주변을 둘러보면 이야기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실감하게 된다. ‘아사달과 아사녀’ 설화는 단지 전설 속 이야기가 아니라 영지 못의 물길이 되고 산책로를 만드는 근간이 됐다.
연못 너머로 토함산이 보인다. 토함산 어깨쯤에 아사녀가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리며 그림자가 보이기를 바랐던 불국사의 석가탑이 있다.
석가탑을 창건할 때 재상 김대성은 당시 가장 뛰어난 석공이라 알려진 백제의 후손 아사달을 불러 석가탑 조성을 맡겼다. 그에게는 아내 아사녀가 있었다. 아사달이 탑에 온 정성을 기울이는 동안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몇 달이면 돌아올 것 같았던 남편은 한 해 두 해가 흘러도 돌아오지 않았다. 하루빨리 석가탑을 완공하고 남편을 기쁘게 만날 날만을 고대하던 아사녀는 기다리다 못해 불국사로 찾아갔다.
그러나 탑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여자를 들일 수 없다는 금기 때문에 남편을 만나지 못했다. 천 리 길을 달려온 아사녀는 남편 얼굴도 못 보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애달픈 마음에 날마다 불국사 문 앞을 서성거리며 먼발치로나마 남편을 보고 싶어 했다.
이를 보다 못한 한 스님이 꾀를 내었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그마한 못이 있소. 그곳에서 지성으로 빈다면 탑 공사가 끝나는 대로 탑의 그림자가 못에 비칠 것이오. 그러면 남편도 볼 수 있을 것이오.” 금기가 깨질 것을 두려워한 스님의 거짓말이었다.
이를 철석같이 믿은 아사녀는 다음날부터 온종일 못을 들여다보며 탑의 그림자가 비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무심한 수면에는 탑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 상심한 아사녀는 고향으로 되돌아갈 기력조차 잃고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못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고 한다.
한편 탑을 완성한 아사달은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영지 못으로 한걸음에 달려갔으나 아내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다. 아내를 그리워하며 못 주변을 방황하고 있는데, 아내의 모습이 홀연히 앞산의 바윗돌에 겹쳐지는 것이 아닌가. 웃는 듯하다가 사라지고 또 그 웃는 모습은 인자한 부처님의 모습이 되기도 했다.
아사달은 그 바위에 아내의 모습을 새기기 시작했다. 조각을 끝낸 아사달은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하나 이후의 이야기는 전해진 바 없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 못을 ‘영지’라 부르고 끝내 그림자가 비치지 않은 석가탑을 ‘무영탑’이라 했다.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감 준 무영탑
무영탑은 수많은 문학인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었다. 특히 민족시인 신동엽은 ‘너를 새기련다’ 라는 시를 통해 아사달의 다함 없는 사랑을 노래했다.
너를 조각하련다 너를 새기련다
이 세상 끝나는 날까지
이 하늘 끝나는 날까지
이 하늘 다하는 끝 끝까지
찾아다니며 너를 새기련다.
바위면 바위에 돌이면 돌몸에
미소 짓고 살다 돌아간 네 입술
눈물 짓고 살다 돌아간 네 모습
너를 새기련다.
나는 조각하련다. 너를 새기련다.
이 목숨 다하는 날까지
정이 닳아서 마치가 되고
마치가 닳아서 손톱이 될지라도
심산유곡 바위마다 돌마다
네 모습 새기련다.
그 옛날 바람 속에서
미소 짓던 네 입모습
눈물 머금던 네 눈모습
그 긴긴 밤
오뇌에 몸부림치던 네 허리
환희에 물결치던 네 모습
산과 들 다니면서 조각하련다.
아사달과 아사녀 설화는 빙허(憑虛) 현진건이 1938~1939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소설 ‘무영탑(無影塔)’에서 유래한다. 무영탑은 석가탑 건립 뒤안길에 서린 전설을 다룬 역사 소설이다. 현진건은 마치 역사 속 실화처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지만 아사달과 아사녀의 이야기는 ‘소설적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역사서 어디에도 ‘아사달’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나마 아사녀에 대한 기록은 일본 동경도서관에 보관되고 있는 불국사 고금창기(경상도강좌대도호부 경주동령토함산 대화엄종불국사고금 역대제현계창기·慶尙道江左大都護府 慶州東嶺吐含山 大華嚴宗佛國寺古今 歷代諸賢繼創記)에 일부 나온다. 영조 16년(1740) 5월에 동은(東隱) 화상이 지은 고금창기는 불국사의 역사적 배경과 건축물, 유물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기록돼 있다. 현재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 사적기로 평가되고 있다.
고금창기에는 “석가탑은 일명 무영탑이라고 한다. 불국사 건축 때 불사를 맡았던 장공(匠工)이 있었는데 그는 당(唐)나라에서 온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누이동생이 있어 아사녀(阿斯女)라고 했다. 아사녀가 오빠인 장공을 찾아왔으나 (당시 건축책임자로 추정되는) 대공(大功)이 아직 석가탑이 완공되지 않아 장공을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장공은 날이 밝는 대로 서방 십 리쯤 된 곳에 가면 천연 못이 있을 터이니 그 못에 가면 탑 그림자가 비칠 것이라 했다. 그녀는 대공의 말을 따라 연못에 가보았지만 탑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석가탑의 이름을 무영탑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따르면 석가탑을 조성한 이는 ‘장공(匠工)’이다. 장공은 높은 기술을 가진 장인을 일컫는 말일뿐 사람의 이름이 아니다. ‘아사달’이라는 이름은 기록에 존재하지 않는다. 설화처럼 아사녀는 아사달의 아내도 아니다. 고금창기 원문에 나오는 ‘매(妹)’자는 누이를 뜻하는 것이지 아내는 아니라고 한다. 더군다나 장공은 백제의 후손이 아니라 당나라에서 온 사람이었다.
□아사달 설화는 소설의 상상력이 빚은 허구
아사달과 아사녀 설화는 신라시대부터 전해져 오는 것이 아니라 소설 무영탑에서 작가가 소설적 상상력을 동원해 만들어낸 허구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정설이다.
아사녀가 연못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것도 근거 없는 이야기다. 석가탑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다면 왜 연못에 그림자가 비치지 않느냐고 스님에게 가서 따지는 것이 더 현실적일 것이다.
영지의 위치에 대해서도 설왕설래가 많다. 설화의 이야기처럼 불국사 석가탑이 완공되면 영지에 모습이 비칠 것이라고 했는데 현실적으로 석가탑의 그림자가 11km(28리) 너머에 있는 영지 못에 비치는 것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사실 영지는 불국사 경내의 백운교, 청운교 앞 구품연지를 가리킨다는 추측이 더 현실적이다.
영지 연못 우측 솔밭에는 통일신라시대 석불인 영지 석불좌상이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04호 석불좌상은 아사달과 아사녀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대략 통일신라시대 8세기 중엽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얼굴은 뭉개졌지만 몸체와 대좌 광배 등은 모두 뚜렷하게 남아 있다. 비바람 등 세월의 흔적으로 망가진 듯 했으나 자세히 살펴보니 누군가 고의로 훼손한 듯하다.
영지를 돌아 나오는 순간 수면 위로 햇살이 비추며 윤슬이 반짝였다. 문득 아사녀의 미소를 본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최병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