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을 가로질러 난 고가철로 그늘에 의자를 놓고 앉아 피서를 한다. 사방이 탁 트인 들판 한가운데라 늘 어디서든 바람이 불어와 더위를 식히기에 안성맞춤이다. 모를 낸지 한 달쯤 지났으니 옛날 같으면 김매기가 한창일 철이지만, 지금은 이따금 오토바이나 트럭을 타고 물꼬를 보러오는 사람들이 고작이다. 잡초나 병충해는 다 약으로 해결하니 태풍이나 홍수 같은 자연재해만 없으면 해마다 풍년을 기약할 수 있지만, 그만큼 자연생태계와는 멀어진 들판이다. 개구리나 물벌레, 곤충들이 어쩌다 눈에 띄면 반가울 정도로 드물어졌다.
초록이 짙어가는 벼논 위에 하얀 나비 한 마리가 이리저리 날고 있다. 벼의 초록과 나비의 하얀색 대비가 선명해서 팔랑거리는 날갯짓이 도드라져 보인다. 그런데 한참을 바라보아도 꽃도 없는 벼논 위를 나비가 날아다니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논가에 개망초꽃이 피었는데도 정작 꽃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나비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하기야 나비가 오로지 꿀을 빨고 꽃가루의 수정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내 눈앞의 나비는 지금 그저 열심히 놀고 있는 것 같다.
팔랑팔랑팔랑…. 나비가 난다. 그것이 존재이유인 듯 나비가 날고 있다. 모든 생명의 본질은 놀이(遊)에 있는 게 아닐까. 무생물까지는 몰라도 모든 생명체들의 생명현상은 환희가 아닐까. 불가에서는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말하지만, 이 여름날의 무성한 초목과 꽃들이 괴로움으로 다가오진 않는다. 우주선을 타고 대기권 밖으로 나가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생물이 살지 않는 태양계의 다른 별들에 비해 지구가 얼마나 가슴 벅차게 아름다운 별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인생 역시 괴롭기 위해서 태어난 것은 아닐 터이다.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선 동서고금에 무수한 주장과 담론이 있었지만 하나로 귀결된 해답은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어느 인생도 슬픔이나 괴로움을 원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기쁘고 즐거운 것이야 말로 인생의 목적이고 의미가 아니겠는가. 인생을 즐거운 소풍이었다는 시인도 있지만, 팔랑거리며 날고 있는 저 나비처럼 인생도 한바탕 놀이라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인류가 문명화되기 이전, 그러니까 구석기시대쯤의 호모사피엔스에게는 인생의 목적이나 의미란 개념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인지의 발달로 종교나 철학 등의 인문학적 사유체계가 형성되면서 스스로에 대한 의문이나 가치부여 같은 인식작용도 따랐을 것이다. 그래서 문명화된 인류에게는 문명사회에 부합하는 책임과 목적과 가치가 있는 것이고, 거기서 벗어나는 것은 반인륜적이라는 지탄과 제재를 받게 되는 게 현실이다.
그런 문명사회에 잘 적응하고 선도적인 역할을 해서 인정을 받고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도 분명 기쁨과 즐거움의 하나일 터이다. 하지만 세속을 떠나 유유자적하는 즐거움도 있는 것이고, 지극히 사소하거나 무용한 것에서 의미와 보람을 찾거나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기쁨인 삶도 있는 것이다. 그런즉 인류의 문명이란 것도 결국 놀이도구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