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신록 속으로 흠뻑 젖어든다. 연둣빛 잎새와 초록빛 잎사귀의 어우러짐 속에 초목은 나날이 싱그럽고 두터워지고 있다. 녹엽의 나부낌과 연록의 여울 속에 여름날이 어느새 손짓하고 있고, 산천은 온통 푸르고 싱그러운 몸짓으로 청록의 서사시를 쓰는 듯하다. 어디를 둘러봐도 무엇 하나 거리낌 없이 계절의 여왕을 찬미하는 듯하니, 코로나19의 지겨움에서 다소 안도하는 사람들은 너나없이 자연을 찾아 신록의 물결 속에 빠져드는 모양새다.
필자 역시 지난 주말, 무심코 초록에 빨려들 듯 풀과 나무들이 반기는 호젓한 오솔길을 걸었다. 봄에는 붉은 꽃에 어리고 가을에는 단풍으로 물빛조차 붉게 물드는 홍류동(紅流洞) 계곡 일대에 조성된 가야산소리길을 지인들과 함께 걸어본 것이다. 실로 오랜만의 반가운 나들이가 아닐 수 없었다. 하긴 코로나의 시달림에 만남 자체가 꺼려지고 위축과 결핍의 시기를 거의 빠져나갈 즈음의 부담 없는 걸음이었으니 오죽이나 가뿐했으랴. 모처럼의 만남과 더불어 어울림만으로도 충분히 푸근한 시간들이었다.
홍류동계곡은 가야산국립공원에서 해인사입구까지 이르는 4km 계곡으로 신라말의 거유(巨儒) 고운 최치원 선생의 발자취가 서린 곳이다. 이곳에는 옛길을 다듬고 복원해 계곡을 따라 걸으면서 자연과 역사, 경관을 탐방하고 체험할 수 있는 가야산소리길이 계곡을 넘나들며 완만하게 조성돼 있다. 소리길 주변에는 최치원 선생이 제자들과 시회(詩會)를 가졌다는 주요 문화자원인 농산정(籠山亭)을 비롯 칠성대, 낙화담 등의 명소가 있고,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자연적 요소를 갖춘 생태학습장이 다양하게 조성돼 있으며, 탐방로 곳곳에는 고운 선생의 시판(詩版)과 담담한 여운을 주는 짧은 현대시 구절이 길바닥의 각석으로 깔려져 이색적으로 읽힌다. 소리길 초입부터 조금씩 들려오는 물소리, 바람소리가 한결 청신(淸新)함을 더해준다. 계곡이 깊어지니 송림 사이로 솔바람이 불어오고 기암괴석에 부딪히는 물소리가 번잡함에 찌든 마음을 금방이라도 씻겨줄 것만 같다. 그에 더하여 요란한 듯 경쾌한 산새들의 재잘거림과 폭포수의 물보라 소리 같은 잎새들의 손 흔드는 소리가 울창한 숲의 음률처럼 변주되니, 과연 자연과 마음의 소리를 들으며 걸어야 하는 가야산소리길로서 전혀 손색이 없어 보인다. 세속의 시끌벅적함을 물소리가 막아줄 정도로 고운 선생이 둔세시(遁世詩)에서 남긴 ‘한번 청산에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라(一入靑山更不還)’는 시구절이 계곡을 벗어나서도 한참 되뇌어진다.
시원한 초록의 바람에 취하고 청아한 소리에 젖어들다 보니 심신의 곤고함이 자신도 모르게 말끔해진 것 같다. 삶에 지치고 온갖 소음과 불협화음이 난무할수록 산이나 계곡을 찾아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계류를 마주하면 어떨까? 물을 보며 마음을 씻고(觀水洗心) 솔바람 소리 들으며 마음을 정결히 하듯이(聽松心自潔), 자연에 들면 눈이 더욱 맑아지고 귀가 한결 밝아지게 되리라. 푸른달 푸른 바람과 계곡의 울림이 빠듯해진 일상을 새롭게 일깨워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