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노송(老松) 아래 아무것도 없었다 (Ⅰ)

등록일 2022-02-14 20:36 게재일 2022-02-15 17면
스크랩버튼
소설가 김강 연재소설 ‘Grasp reflex’
/삽화 이건욱

달고 묵직한 향이 흘러내렸다. 국화 향은 장례식장 입구와 빈소를 바닥부터 채웠고 만식이 누워있는 관보다 높은 곳까지 쌓였다. 만식이 가지고 갈 마지막 기억은 국화 향이었다. 조의금 함에서 새어나온 지폐의 냄새가 약간 섞이는 정도면 충분했다.

조문객들이 문을 열 때마다 바람이 들어와 국화 향을 흔들었다. 필립의 코끝에 국화 향이 닿으면 필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세 걸음 앞으로 나가 영정 앞의 향로에 향을 더 피웠다. 국화 향이 흔들린 틈으로 다른 무언가가 들어갈 것 같았다. 필립은 만식이 국화 향과 지폐, 향로의 향을 제외한 다른 냄새를 기억하는 것이 싫었다. 이를테면 안나와 그 자식의 냄새. 비록 필립이 약속한 삶들이기는 했지만.

필립은 두 번째 자식이었다. 안나의 뱃속에 세 번째 자식이 있었지만 그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안나와 그 자식을 어찌 대할지는 오로지 필립과 필립이 얻게 될 것들에 달려 있었다. 물론 필립은 약속을 잊지 않았다. 만식과의 약속, 노마와의 약속 모두. 지키지 못할 약속을 왜 하나? 회의석상에서, 직원과의 공식적인 대화 자리에서 필립이 즐겨 쓰던 말이었다.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넣고 결국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필립은 그런 날이면 당사자를 불러 술을 사주고 어깨를 토닥였다. 약속은 어기라고 있는 거지, 그렇지 않아? 이렇게 말하며.

들어가 좀 쉬세요. 몇몇 사람들이 안나에게 말했다. 안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리 내 울지는 않았지만 쉼 없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울다가 지치면 반대편 벽을 보거나 한숨을 내뱉으며 어휴, 하고 신음 소리를 냈다. 필립은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만식의 영정을 올려다보거나 방바닥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가깝지 않은 사람들, 조문객들 중 일부는 안나가 필립의 아내인지 필립의 여자 형제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필립에게 직접 묻지 않았다. 자신들의 테이블로 돌아가 묻고 상상했다. 필립 또한 나서서 설명하지 않았다. 안나를 아는 사람에게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고 안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저 여자는 왜 빈소에 두는 거냐? 상복까지 입히고.

필립이 화장실에 들어서자 뒤따라온 외삼촌이 물었다. 오래전 죽은 누이의 남편 빈소임에도 찾아와 조문을 하고 허드렛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고마운 일임에는 분명했지만 필립은 고맙다 말하지 않았다. 필립의 경험에서 외가의 삼촌은 친가의 삼촌에 비해 기능이 떨어지는 어떤 것이었다. 어릴 적에는 용돈과 재미에 있어 그랬고 나이가 들어서는 필립과 만식에게 기대는 정도에 있어서 그랬다.

벌써 세 번째 같은 것을 물었다. 여전히 누이의 자리라 생각했던 곳에 다른 여자가 서 있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지만 안나의 자리는 필립이 판단할 일이었고 결정한 일이었다. 필립에게는 외삼촌이 와 있는 것이나 안나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나 같았다. 둘 다 장례식장 외벽 우수관을 감고 오르는 질긴 넝쿨이었다.

-아버지 가시는 자리를 시끄럽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냥 둘 생각입니다. 이젠 그만 물으십시오.

바지 지퍼를 올리고 세면대로 향하는 필립의 뒤에서 외삼촌이 말했다.

-네가 엄마에게 어찌 이럴 수 있냐?

필립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손을 씻은 후 종이 타올로 손을 닦고 거울을 보았다

-그러니까요. 엄마의 아들인 제가 결정한 일이니 그냥 계시라고요. 저도 웃으며 결정한 것은 아니니.

 

자정을 넘어서자 조문객의 수가 줄어들었다. 오늘은 첫날이니까. 내일은 오늘보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 분명했다. 만식은 죽었지만 만식이 하던 일은 남았고 만식이 가졌던 것들 또한 남았다. 누군가 이어가야 할 일, 누군가가 가질 것들. 필립이 그 누군가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자리에 와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필립은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안나를 보았다. 얼굴이 부어 있었다. 뱃속에 아이가 있는 젊은 여자가 버티기에 힘든 하루였다. 황당하겠지, 슬프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저 여자 오늘 조금 많이 울었지. 정말 아버지를 사랑한 건가? 아니면 뱃속의 아이 때문에 그러는 건가? 필립은 안나의 감정과 생각이 궁금했지만 그저 궁금할 뿐이었다. 안나의 감정과 생각을 안다고 해서 바뀔 것은 없었다.

-오늘은 더 이상 오실 분이 없을 것 같네요. 들어가서 좀 쉬세요. 내일은 오늘보다 힘든 하루가 될 겁니다.

안나는 잠깐 머뭇거리다 일어섰다.

-그러면 조금만 쉬었다 오겠습니다. 회장님께서도 눈 좀 붙이시는 것이. 조금이라도.

회장님이라. 지금 나더러 회장이라 부른 건가? 허, 참. 알 수 없는 사람이네. 필립은 빈소 옆 작은 방으로 들어가는 안나를 보며 생각했다.

김강 작가 2017년 제21회 심훈문학상 소설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 ‘여행시절’(공저) ‘당신의 가장 중심’(공저) 등을 썼다.
김강 작가 2017년 제21회 심훈문학상 소설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 ‘여행시절’(공저) ‘당신의 가장 중심’(공저) 등을 썼다.

소설가 김강 연재소설 ‘Grasp reflex’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