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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코뿔소와 저승사자

등록일 2022-01-26 20:29 게재일 2022-01-27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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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욱포스텍 교수·인문사회학부
노승욱포스텍 교수·인문사회학부

코스피가 이번 주 들어서 블랙 먼데이를 기록했다. 13개월 만에 2천800선 아래로 하락한 것이다. 미국발 긴축 한파가 우리나라 자산 시장을 덮치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골드만삭스는 올해 미국 연준의 금리 인상이 4회 이상을 초과할 수 있다고 예측했다.

그렇지만 우리 경제는 작년까지도 유동성 파티를 즐겼다. 부동산은 폭등세를 멈추지 않았고, 동학개미와 서학개미로 양분된 개인 투자자들은 국내외 주식 시장에 올인했다. 대출이 증가하면서 국내 은행이 작년에 벌어들인 이자 수익만 30조 원을 넘었다.

미국의 정책분석가인 미셸 부커 전 세계정책연구소장은 ‘회색 코뿔소가 온다’라는 책에서 분명히 눈에 보이는 위험 징후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회색 코뿔소 현상’이라고 지칭했다. 많은 전문가들이 우리나라의 가계 부채를 회색 코뿔소에 비유하며 경고했지만, 국내 가계 대출은 이미 1천800조 원을 훌쩍 넘어섰다.

자고 나면 자산 가격이 오르는 상황에서 국민들의 불안감도 극도로 커졌다. 코로나바이러스라는 눈앞의 공포보다, 벼락거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영끌족과 빚투족을 만들어냈다. 미국의 신경과학자 조지프 르두가 말했던 것처럼 불안은 본질적으로 온 마음을 빼앗아버리는 속성이 있다.

회색 코뿔소가 목전에 다다르자 금융당국의 수장들이 잇따라 경고 메시지를 내놓고 있다. 가계 부채 저승사자를 자처하는 고승범 금융위원장은 “회색 코뿔소로 비유되던 잠재 위험들이 하나둘씩 현실화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다양한 리스크가 일시에 몰려오는 퍼펙트 스톰을 경고했던 정은보 금융감독원장은 “금융회사들은 부동산 관련 자산에 대해 충당금을 충분히 적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승사자의 대출 규제 처방으로 가계 부채 증가세는 잠시 주춤한 상태이다. 하지만 대선 정국에 돌입한 정치권에서는 저승사자가 잠가놓은 빗장을 다시 풀고자 할 수 있다. 전방위적 대출 규제에 대해 실수요자 프레임이 제기되는 이유이다. 올해 1분기에는 은행의 대출 규제가 완화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최근에 정부는 14조 원 규모의 추경안을 의결해 국회에 제출했다. 정부가 1월에 추경을 편성한 것은 1951년 이후 71년 만에 처음이다. 대선 직전의 추경은 1997년 이후 25년 만에 처음이다. 2022년판 고무신·막걸리 선거라는 비난도 일고 있다. 회색 코뿔소가 코앞에 와있다지만, 대선을 앞둔 대한민국에서는 경제 논리보다 정치 논리가 앞서고 있다.

경제 상황에 대해 정치권과 금융당국의 인식이 엇박자가 날 때마다 회색 코뿔소가 다가오는 진동음도 커진다. 일각에서는 회색 코뿔소가 블랙 스완으로 변신할 수 있다는 점도 경고하고 있다. 그만큼 모든 자산에 심각한 거품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견되는 경제 위기로부터 국민을 지키기 위해서는 회색 코뿔소를 막아낼 저승사자의 존재가 절실하다. 대권을 잡겠다고 나선 후보들도 회색 코뿔소에 대응하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내놓아야 한다. 무섭게 느껴지는 저승사자를 이번에는 국민들이 반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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