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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질 수 있는 것들을 가질 것이다 (IV)

등록일 2022-01-24 20:05 게재일 2022-01-25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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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이건욱

그날 밤 경찰은 중문의 해안 절벽 아래에서 만식의 아내를 발견했다. 이미 숨이 멎은 뒤였다. 유서 따위는 없었다. 경찰은 실족사라 결론 내렸다.

-어찌된 일이냐?

급하게 내려온 만식이 필립에게 물었다.

-와인을 찾으실 정도로 기분 좋으셨습니다. 산책을 하자 하셔서 같이 걸었습니다. 바람이 불어 쌀쌀했습니다. 어머니께서 입으실 겉옷을 가지러 갔다 오니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찾았습니다. 절벽 아래에 계셨습니다.

만식은 필립의 뺨을 두 차례 때렸다. 필립의 몸이 휘청했다. 만식이 한 번 더 필립의 뺨을 때리려던 순간 수행해 온 비서가 만식의 손을 잡았다.

-저도 이게 무슨 일인지. 왜, 왜 다들 제게 이러는 건지.

필립은 붉게 달아오른 뺨에 손을 대며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고 떨렸다.

-내가 너에게 말했다. 자식을 잃은 것으로 충분하다고. 아내마저 잃고 싶지 않다고.

 

이 교수가 병실을 나가고 만식은 옷을 갈아입었다. 하필이면 퇴원하시는 날, 죄송해요. 산전 진찰 예약이 되어 있는 날이라서. 안나가 말했었다. 하루만 더 병원에서 쉬시는 것은 어때요? 그러면 제가 와서 모실 수 있을 텐데. 산전 진찰을 미룰까요? 처음 해본 수술도 아니고 충분히 쉬었다가 퇴원하는 것이니 혼자 나갈 수 있어. 만식이 대답했다. 병원에 너무 오래 있었어. 답답하기도 하고. 우리 아기와 안나의 건강을 체크하는 일인데 미룰 수는 없지. 집에서 보도록 하지. 비서실에 이야기해 두었어. 여기로 오지 말고 안나에게 가라고. 그렇게 알고 있어. 아드님이라도 오시라 할까요? 안나가 물었다. 만식은 손을 내 저었다. 아니야, 내가 출장 보냈어. 아드님이라. 그렇지, 하나 남은 아들이기는 하지. 아직까지는. 만식은 필립을 생각했다.

필립에게 핸드폰을 집어 던졌던 다음날 만식은 필립을 불렀다. 필립에게 약속을 받아야 할 것도 있었고 약속을 해주어야 할 것도 있었다. 안나를 새엄마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당연히 혼인 신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혼 관계 등등의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조치하겠다고 다짐해주었다. 만식은 안나와 계약서를 작성할 것이라 했다.

그녀와 그녀의 뱃속에 있는 아이의 권리에 대한, 세월이 흐른 뒤에라도 그녀와 그녀의 아이가 주장해서는 안 되는 것들에 대한 계약서를 만들어 공증을 받아두겠다 말했다.

만식, 자신을 위해서였다. 필립이든 안나의 뱃속 아이든 자신이 허락한 것 이상을 가져갈 수도 요구할 수도 없어야 했다. 내가 죽고 나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누가 무엇을 가지든 상관없어. 하지만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다르지. 내 것들이니까. 내가 이룬 것들이니까. 내가 가져야 할 것들이 아직 남아있으니까. 만식은 무거워진 욕심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떼어내고 싶지 않았다. 욕심 주머니들을 놓아버리는 순간 한없이 가벼워져 둥둥 떠오를 것 같았다. 한 점 바람에 날려 저 세상 어딘가에 처박힐 것이 분명했다. 안나 뱃속 아이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내가 죽은 후 누가 무엇을 가져가든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없지, 아무렴.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필립에까지 생각이 이르면 만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녀석에게 넘길 수는 없지. 언젠가는 누군가를 선택해야겠지. 하지만 그 누군가가 필립이어서는 안 돼. 그러니까 오래 사는 수밖에. 더더욱 건강하게, 더더욱 오래. 안나 뱃속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자신의 것이 무엇인지 알 때까지, 자신의 것을 지킬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저 아이가 무서워요. 만식이 아내와 함께한 마지막 여행의 첫날 그녀가 말했다. 유언 같은 그녀의 말이 만식의 머리를 맴돌았다. 인정할 수 없는, 받아들일 수 없는 장면들이 만식의 머리에서 마음으로 다시 머리로, 필립을 바라보는 만식의 눈으로 옮겨 다녔다. 만식은 첫째 아이가 죽던 날, 아내가 죽던 날의 필립을 상상했다.

김강 작가 2017년 제21회 심훈문학상 소설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 ‘여행시절’(공저) ‘당신의 가장 중심’(공저) 등을 썼다.
김강 작가 2017년 제21회 심훈문학상 소설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 ‘여행시절’(공저) ‘당신의 가장 중심’(공저) 등을 썼다.

형제를 잃고 엄마를 잃은, 심지어 그 모든 자리에 있었던 필립이 불쌍하기도 했다. 간혹 그 모든 자리를 이유로 아비의 정 대신 분노를 채운 자신이 과하다 여긴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만식은 자신의 삶이 길어질수록 필립이 두려웠다. 주위를 서성이며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필립이. 그리고 화가 났다.

회사의 일이든 집안일이든 만식이 정한 선을 필립이 넘어설 때마다 만식은 필립에게 물었다.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반드시 스스로 서는 것입니다. 필립이 대답하면 언젠가, 언젠가는 그날이 오지 않겠느냐? 하지만 아직은 아니니 서두르지 마라, 나는 아직 굳건하다. 기다리기 힘든 일이더냐? 만식이 되묻고는 했다.

-네가 약속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 있다.

안나와의 계약서에 대해 이야기를 한 뒤 만식이 이어서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저의 약속이겠습니까? 아버님의 당부이겠지요. 저는 따르기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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