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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정원 노트

등록일 2022-01-02 18:06 게재일 2022-01-03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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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발견한 책 두 권.

자주 가는 찻집이 있다. 집 가까이 있어서 걸어가면 좋은 거리이다. 가게 안 곳곳에 주인장이 오래전부터 하나씩 간직해 온 애장품이 가득하다. 아기자기한 소품을 구경하는 데만 한참이 걸린다. 그 물건이 태어날 때는 소소한 쓰임새였지만 오래 간직하니 이제는 다시 구하기 힘든 귀한 보물이 됐다. 향이 좋은 홍차를 주문해 놓고 새끼손톱만 한 나무로 만든 직인부터 다리가 달린 오래된 소형 텔레비전, 벽에 붙은 기하학적인 무늬의 욕실 발 매트, 창가에 꽃병인가 하고 다가갔더니 책으로 변신하는 팝업북, 이런 소품을 보다 보면 자리로 차가 배달된다.

이 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소품이라면 책이다. 테이블 옆에 나지막하게 놓은 책꽂이에 꽂힌 아롱다롱한 책등이 멋진 인테리어다. 제목을 자세히 보니 주인장의 취미가 보였다. 홍차, 쿠킹, 바느질, 가드닝에 관한 책들이 등을 나란히 하고 엎드렸다. 그중에 두 권이 눈에 더 들어와 차가 우러나는 동안 꺼내 펼쳤다. ‘보태니컬 셰익스피어’는 식물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시적인 글귀에 정교한 색연필화가 더해진 책이라 반해버렸다. 앉은 자리에서 바로 휴대폰으로 같은 책을 주문했다.

또 한 권은 ‘정원 생활자의 열두 달’이라는 제목의 책이다. 정원 꾸미는 일에 1도 관심 없지만 아주 쉽게 써 놓은 글에 삽화까지 더 해서인지 책장이 잘 넘어갔다. 소장하기엔 욕심이고 더 읽고 싶은데 도서관에 가서 찾아볼까 고민하는데 갓구운 스콘 하나를 맛보라며 뜨거운 찻물과 함께 내민다. 주인장에게 물으니 단골이라 빌려 가도 좋다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책을 품고 돌아오는 길에도 입안에 홍차 향이 가득했다.

1월에는 정원 가꾸기의 1년 계획을 짜는 일부터 시작된다. 몇 해 전까지 나도 12월 말이면 내년에 할 일을 꼼꼼히 적어 놓고 실천하려고 애썼다. 그러다 너무 애쓰며 사는 거 같아 계획부터 세우지 말자 결심하고 쉬엄쉬엄하기로 내려놓기를 실천하는 중이다. 가드닝 하는 사람들의 겨울은 정원에 꽃이 없는 달이니 나처럼 방학인가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봄에 피는 식물의 월동 확인부터 온실에서 씨앗 파종하기, 화단을 조성할 곳의 흙 정리도 해야 하고 병충해도 관찰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가지치기였다.

어릴 적 나는 과수원집 딸이었다. 겨울방학이면 전지(가지치기)를 전문으로 하는 아저씨들이 집에서 숙식하며 며칠씩 일을 했다. 키 작은 언니와 나는 아저씨들이 지나간 나무 아래에 잔가지를 주워 모으는 담당이었다. 추운 날엔 꾀를 부려 친구네로 숨기도 해서 혼자 일한 언니가 눈을 흘기며 씩씩거리기도 했다. 그땐 왜 나무를 자꾸만 잘라내는지 가만히 두면 더 커서 열매가 더 많이 열린텐데 싶었다. 이 책에 보니 가지치기의 목적은 나무 모양을 아름답게 잡고 열매를 좀 더 튼실하게 키우기 위함이라고 한다.

가지를 쳐내는 게 어떻게 열매를 튼실하게 한다는 거지, 왜 하필 추운 겨울에 상처를 내는 걸까 했던 내 의문의 답도 책에 있었다. 한 해 동안 열심히 살아오다 겨울 앞두고 나무가 잎을 떨어뜨리면 병든 가지가 잘 보인다. 서로 부딪쳐 손상된 가지, 엉켜버려 서로의 성장에 방해가 된 가지 등속들을 새잎이 나오기 전에 정리해 줘야 나무가 건강하게 봄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봄맞이하기 위해 나도 가지치기를 하기로 했다. 먼저 안방 옷장을 정리했다. 지난 1년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은 골라내서 쓸만한 것은 벼룩시장에 내놓고 나머진 수거함에 넣었다. 또 가지치기해야 할 종목은 휴대폰 안에 있다. 몇 해 동안 연락하지 않은, 이름만으로 누구인지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명단을 추려냈다. 그리고 저장공간을 가장 많이 차지 한 사진 정리를 몇 시간에 걸쳐서 했다. 지워야 할 것인지 남겨야 할 사진인지 결정하는 일이 만만찮았다. 사과나무 가지치기만큼 어려웠다. 잔가지 줍듯 하나하나 골라 불쏘시개로 던졌다. 남은 저장공간이 간당간당하다가 휴지통까지 비워내니 여유 공간이 생겼다.

여유 공간 틈으로 2022년 1월 내 삶의 새순이 움트기 시작했다. /김순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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