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이 도착했다. 산타할아버지 같은 친구가 멀리서 보내온 보따리를 풀었다. 참하게 포장한 반짝이는 리본을 풀자니 아까울 지경이다. 손편지까지 써서 실어 보낸 것이라 친구의 마음을 열어보는 기분이다. 이십 대 청년이 된 아들 둘의 어린아이 모습까지 기억할 만큼 오래 이어진 인연의 끈이다.
오래된 끈과 띠를 모아 국립대구박물관에서 한국의 복식 특별전을 한다기에 길을 나섰다. 포항과 대구를 잇는 긴 띠인 고속도로를 달려가니 한 시간 조금 더 걸려 도착했다. 코로나가 창궐하는 때 닫힌 공간이라 걱정했는데, 그 넓은 곳을 돌아보는 내내 박물관이 온통 내 차지였다. 조용하게 전시품과 영상과 글을 온전하게 느꼈다.
첫 방에는 왕의 허리띠가 놓였다. 벽 전체에 끈이 흔들리고 띠가 출렁이는 영상이 흐른다. 배 부를 때와 고플 때 시시각각 달라지는 허리에 맞게 유연하게 대처하는 허리띠의 미학에 대한 짧은 시였다. 창(猖)은 미쳐 날뛰다, 어지럽다란 뜻의 한자이고, 피(披)는 헤치다, 펴다, (끈을) 풀다 라는 의미를 품었다. 그래서 헐렁한 우리 한복을 입고 끈으로 매무새를 다듬지 않으면 ‘창피하다’란 말로 이어진다. 사극에 등장하는 술 취한 사람이나 미치광이는 옷고름이나 허리띠 없이 옷이 풀어 헤쳐져 있다. 창피한 복장이다.
우리나라에 허리띠가 처음 등장한 것은 이천 년이 넘었다고 한다. 서봉총의 금허리띠는 신라 시대가 황금의 나라였다는 것을 자랑하였고, 금속공예로 구현된 고려의 허리띠는 문양에 등장하는 사람이 내 엄지손톱보다 작아 그 섬세함을 느끼려면 돋보기로 봐야 할 지경이다. 왕의 허리띠에는 가장 귀한 재료로 그 시대를 대표하는 기술이 모두 들어가서 위엄과 기품을 느끼게 했다.
조선 시대의 신분증인 호패도 허리에 끈으로 매달았다. 첫 돌에는 다섯 가지 색을 넣은 오방장두루마기나 까치두루마기라 불린 옷을 입히고 오래 살라고 십장생을 수 놓은 돌띠를 매 주었다. 그림책 ‘나는 기다립니다’가 생각났다. 빨간 털실 한 가닥이 이어져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기를 기다리고, 배우자가 떠나며 끈이 끊어지지만, 자식이 자라 뱃속에 손자가 다시 빨간 끈으로 표현돼 삶이 빨간 털실로 끝없이 이어진다는 이야기이다. 전시회 마지막 방을 나오기 바로 전에, 두 개의 허리띠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하나는 김일 선수의 챔피언 벨트. 어린 시절 텔레비전이 있는 집이 몇 집뿐이라 ‘김일 레슬링’을 보려고 좁은 방 가득 동네 사람 모두가 들어왔었다. 경기는 박치기왕의 승리로 끝났고 방을 나오는 사람들 얼굴이 모두 발갛게 홍조를 띠었다.
또 하나의 띠는 고희경 대위의 것이었다. 부모님 전 상서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딘가에 계실 아버지와 어머님께 드리는 편지가 또박또박 적혔다. 육군사관학교에 합격하자 나라에 큰일 하게 되었다고 기뻐하셨는데 곧바로 6·25가 터져 안부도 전하지 못하고 급히 전쟁터로 가게 되었다. 포탄이 터지는 포항에서 전우들과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며 1950년 8월 어느 여름 불효자 올림이라 끝맺는다.
그다음 글이 추신인가 하고 보니, 이 편지가 가상의 것이란 설명이었다. 고희경 중위는 전투에 참여한 지 두 달 만에 포항 기북면 무명 380고지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목에 걸고 있던 인식표와 띠쇠와 계급장이 2009년 유해발굴감식단에 의해 유해와 함께 발견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유가족을 찾지 못해 가상의 편지를 작성해보았다는 설명이었다.
전투 중에 동료가 사망하면 앞니 사이에 인식표 하나를 박고 남은 하나의 인식표는 수거해 온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누구의 유해인지 알 방법이라고 한다. 아들도 군대에서 더미를 이용해 이 방법을 배웠다고 덧붙였다. 고희경 중위는 전사한 후 한 계급 올라 대위가 되었지만, 가족과의 끈이 아직도 이어지지 못했다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박물관을 나오며 70년간 끊어진 빨간 인연의 끈이 어여 가 닿기를 기도했다.
/김순희(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