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기술, 주술, 마술은 역사 속에서 기묘한 관계를 맺어 왔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미술을 테크네(τ<03AD>χνη)라 불렀다. 테크네는 기술, 기교를 뜻하는 테크닉의 어원이기도 하다. 테크네는 인간이 기술적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 전체를 가리키며 여기에는 미술도 포함된다. 그리스어 테크네를 고대 로마인들의 라틴어로 옮긴 것이 아르스(ars)이다. 오늘날 우리가 예술 혹은 미술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 아트(art)가 여기서 왔다. 예술의 어원은 예술이 기술과 떼려야 땔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보여준다. 음악가들은 오랜 시간의 연습과 훈련을 통해 악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무용수들 역시 동작을 익히고 유연성과 표현력을 높이기 위해 계속해서 몸을 단련한다. 미술가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는 기법을 익히는 것은 물론이고 사용하는 재료, 필요한 도구를 만들고 다루는 기술을 마스터한 후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미술가로 활동할 수 있었다. 적어도 도제식 교육을 받던 르네상스 시대까지는 그랬다.
대부분의 예술 장르에서 기술은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기교나 기술적 완벽함이 음악가를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은 아니지만 탁월한 음악가에게 기술적 완성도는 기본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무용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현대미술은 형편이 많이 다르다. 미술사학에서는 대체적으로 현대미술의 태동 시점을 19세기 중반으로 본다. 이전 미술이 따르고 쫓았던 규칙, 원리, 규범, 가치를 부정하면서 현대미술이 태어났다. 15세기 르네상스부터 현대미술 태동기까지 서양미술의 근간은 모방과 재현이었다. 잘 모방하고 잘 재현하기 위해서는 숙련된 기술이 필요했다. 르네상스 이전 고대나 중세 까지만 하더라도 미술가는 기술자였다. 육체노동을 천시했기 때문에 미술가의 사회적 지위는 높지 않았다. 르네상스 미술가들은 미술창작이 몸을 쓰는 육체노동에 그치지 않고 고대의 시인들처럼 고도의 정신작용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미술가들은 기술을 익혀야 했음은 물론이고 기술로 구현될 그림이나 조각에 정신적 가치를 담아야 했다. 그렇게 등장한 것이 르네상스의 만능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같은 거장들이다.
그렇다면 마네, 모네, 세잔 등을 비롯한 이른바 현대미술의 선구자들은 무슨 이유 때문에 앞선 미술에 반기를 들고 규칙과 규범들을 깨트렸던 것일까? 이유는 분명하다. 미술이 권력화 되어 권위적이고 배타적이며 폐쇄적이고 경직되었기 때문이다. 자유로이 사유하고, 자유로이 탐구하고, 자유로이 창작하던 르네상스 미술정신이 어떻게 그토록 변질되어 버린 것일까? 이와 관련해 여러 요인들이 제시될 수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1648년 프랑스 왕립미술학교의 설립이다.
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로마 가톨릭의 교세가 급격히 위축되었다. 종교개혁자들에 맞서 가톨릭교회는 반종교개혁의 움직임을 형성했고 그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바로크미술이다. 장식성이 강한 바로크 미술은 화려하다. 앞선 르네상스 미술이 비례, 균형, 조화, 통일을 추구했다면 바로크에서는 비례와 균형이 무너지고 조화나 통일성 대신 스펙터클이 펼쳐졌다. 로마에서 바로크가 발달할 때 까지만 하더라도 서양미술의 중심지는 이탈리아, 그중에서도 로마였다. 그런데 루이14세가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한 17세기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미술사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자신을 ‘태양 왕’으로 신격화한 절대왕정의 루이14세는 국가의 모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정책들을 폈다. 절대적 권력의 상징이 되는 곳이 베르사유 궁전이다. 늪지를 메워 상상을 초월하는 궁전을 세우고 35㎞ 떨어진 센 강으로부터 파이프로 물을 끌어와 화려한 분수로 장식된 어마어마한 정원을 조성했다. 미술은 오랫동안 권력의 불편한 동행자였다. 권력은 선전도구로서 미술을 활용했고, 미술은 기꺼이 그 필요를 충족시켜 주었다. 절대왕정을 위한 미술가를 양성하기 위해 1648년 서양미술사 최초로 국립미술교육기관 ‘왕립미술학교’가 설립되었다. /미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