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 길이가 눈에 띄게 짧아진 추분(秋分)에 진평왕릉을 돌아본다. 여름의 흔적이 하나씩 지문처럼 지워진 자리로 단풍든다. 여름의 울울창창하던 시간이 버드나무의 짙은 그림자에 묻힌다. 주위는 논밭이 자리 잡고 있어 여름이면 개구리소리 요란하고 풀벌레 소리에 가을을 실감한다.
진지왕과 선덕여왕사이인 신라 26대 진평왕, 그의 능으로는 아직 뜨거운 햇살 한줌이 고요히 내린다. 능을 휘돌아보면 그 흔한 호석도 없고 무신상과 문인상 하나가 없다. 그저 모든 것에서 해탈한 듯 보이는 능이다. 왕릉은 그대로지만 온 사람 간 사람의 추억이 여기저기 머물다 흩어진다.
푸른 고요가 홰치는 아침과 함께 사라지면 돗자리를 들고 소풍 온 사람들과 웨딩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능 주위가 소란하다. 혹여 밤새 긴 연회로 왕의 곁에 있던 무희들도 휘모리장단에 맞춰 춤을 추었던 것은 아닐까. 빙그르르 돌던 놀이로 박제된 채 주름진 치마와 장구를 치는 모습으로 왕릉주위에 목석처럼 붙박이가 되어있다.
오래전 문인들과 문화재 해설사가 왕릉주차장에서 만났다. 돗자리를 깔고 진평왕과 선덕여왕의 야사(野史)를 듣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열세 살에 왕위에 오른 진평왕의 첫 여인이 미실이었다. 화랑세기에 ‘용모가 절묘하여 풍만함은 옥진을 닮았고, 명랑함은 벽화를 닮았고, 아름다움은 오도를 닮았다’고 하였다. 세 명의 왕을 모신 대원신통의 여자로 역사서에도 다시없을 미실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진진했다. 선덕여왕도 부친의 영향으로 풍채가 좋았다고 한다. 맞은 편 해가 저무는 야산이 꼭 부처가 누워있는 듯이 보이는 것도 이야기를 듣고서야 동감하며 다시 보았다. 두 부녀가 평야와 산기슭에 능을 만든 이유는 신라를 지키고자 하는 똑같은 마음 때문은 아니었을까.
진평왕은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중앙 행정부서를 설치하고 중국의 수·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통해 백제와 고구려의 침공을 막았다. 왕릉에서 봄 벚꽃, 가을 코스모스가 피고 수로를 따라 걷는 길의 끝이 명활산성이다. 그때 산성을 보수하여 수도 방위에 힘썼다. 천사백년 전 신라 땅에서 일어난 일이다.
신라에서 이어진 이 왕릉은 찾는 사람들에게 위안과 기쁨을 준다. 큰 나무의 가지가 뻗은 곳 아래 벤치가 있다. 그를 ‘나의 의자’라 칭하고 삶의 고단함으로 지칠 때 그 곳에 앉아 왕의 무덤을 오래토록 바라보았다. 아무것에도 묶이지 않는 시간과 공간과 거리의 어디쯤에 왕과 마주친 운명의 시간이 있었던가. 알 길은 없지만 그 시간만큼은 편안했다. 왕릉의 소박함과 서있는 나무들의 생김새는 그 아래 있는 누구라도 품어 줄 것 같은 넉넉함이 있다. 설총이 태어난 남촌마을 곁의 햇빛이 소복이 모이는 명당이다. 삼년을 밤낮으로 찾던 시간이 지나자 기이하게 마음은 안정을 찾았다. 인(因)과 연(緣)의 화합에 의한 결과인지는 두고두고 나의 숙제다.
가을태풍이 지나간 뒤 안개를 헤치고 들어서는 왕릉은 성처럼 넓으면서도 아늑하다. 왕의 신전에 도달한 내가 정원수들의 인사를 받으며 한 걸음씩 떼면 어디선가 궁녀들의 웃음소리 낭창하게 들리는 듯하다. 지나간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은 역사물을 많이 본 탓일까. 햇살이 안개를 가로지르면 신비한 상상과 공상은 지니의 램프처럼 사라진다. 어느 자리라도 좋다. 선 자리에서 나무와 왕릉을 바라보다 천천히 왕의 세계를 여행하면 된다. 아무도 금을 그어두지 않은 그곳이 안식처이며 평온의 세상일 수 있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햇살이 눈부시면 눈부신 대로 비바람이 불면 우산 하나에 의지하거나 차 안에서 그냥 바라만 봐도 왕릉이 주는 신비한 아름다움과 평온함에 넋을 잃는다.
시간여행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려주는 ‘아무카페’에 앉아 능을 바라보는 호사를 누린다. 카페라떼 한잔의 여유로움으로 왕릉과 주위의 나무에 눈길을 준다. 스친 숱한 인연과 역사와 희로애락이 저 푸른 팽나무와 버드나무로 남았다. 많은 왕릉과 과거를 잇는 문화재들이 경주에는 차고 넘친다. 그 중에서도 마음을 추스르게 할 왕릉이 여기 있으니 잠시 찬가를 불러본다.
소슬한 갈바람에 추분의 아침고요가 지금 능을 감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