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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꽃

등록일 2021-06-02 20:10 게재일 2021-06-03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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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문경수필가
배문경수필가

카톡이 날아왔다. 열어보니 어머니가 살림에 필요한 물품을 올려놓으셨다. 띄어쓰기는 없고 연이어 붙인 낱말들이 긴 연의 꼬리처럼 느껴진다.

작년 초 어머니는 글을 배워보고 싶다고 하셨다. 연세가 여든 가까운데, 괜한 고생을 하신다 싶었다. 가까운 곳에 한글 가르치는 장소가 있다는 현수막을 보셨던 모양이다. 흔쾌히 문해학교에 등록하신 후 배우러 다니셨다. 어머니는 보고 읽는 것은 되지만 글자는 발음대로 쓰셨다. 글자 하나하나가 삐뚤빼뚤하게 늘어졌다. 두 글자가 써진 단어를 쓰며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읽으셨다. 아이들 한글 깨치기와 비슷했지만 열의는 그 이상으로 느껴졌다. 작은 상을 방에다 가져다 놓고 집중해서 연습하곤 하셨다. 코로나로 인해 쉬는 날이 많아 집에서 교재로 연습했다. 더러는 단톡에 단어를 올렸는데, 문장은 아니고 단어나열에 그쳤다. ‘희설타우유올리기름’ 아이가 쓴 글 같았지만 연이어 쓴 글자가 재밌었다.

언젠가 컨벤션센터행사에 참석했다가 그곳에서 유치원생이 그린 것 같은 작품이 전시된 것을 보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크레파스로 색을 칠하고 그 옆에 짧은 단상을 적었다. 노인들의 시화작품 전시였다. 글을 배우니 너무 행복하다는 내용이었는데 꽃과 나비가 그려져 있었다. 자신의 감정을 쓰고 그릴 수 있었으니 얼마나 기뻤을까. 그 심정이 고스란히 내게도 전해져 뭉클했다.

어머니 세대가 그랬다. 고통스러운 일제의 지배가 끝나나 싶으니 동족상잔의 전쟁이 터졌다. 먹고사는 일이 너무 힘들어 죽지 못해 살아온 세대다. 그러니 자신을 위해 공부할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힘들게 보릿고개를 넘기면서 노동으로 자식들을 뒷바라지한 세대다. 이제 자신을 위해 글씨를 배우고 그림을 그려 아름다운 세상을 노래한다는 것은 말년의 행복이다.

우리 삶에서 성공과 행복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는 교육 부족이라고 했다. 특히 읽고 쓸 수 없다는 것은 앎에서 고립된다는 뜻이다. 전 세계 인구의 약 14%가 문맹이고 문맹의 2/3 가 여성이다. 전 세계 국가의 39%만이 남학생과 여학생에게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준다고 한다. 배우려 해도 교육 시스템이 부족하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란 책과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영화는 한나와 마이클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마이클이 책을 읽어주고, 나이 차이에도 사랑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 이후 마이클은 문맹인 한나에게 ‘오딧세이’와 안톤 체홉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를 읽어준다. 한나는 자신이 글자를 모른다는 것을 철저히 숨기기 위해 글자를 몰라도 되는 직업을 선택하며 마이클을 떠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책임자로 일을 한다. 이 일로 감옥에 투옥되고 법정에서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을 숨기면서 무기징역을 받는다. 글자를 모른다고 실토했다면 4년의 구금으로 끝날 일인데.

이후 다시 만난 마이클이 책을 읽은 테이프를 감옥으로 보내자 발음과 글자를 보면서 한나는 글을 깨쳐간다. 글자를 익힌 그녀는 마이클에게 고마움의 편지를 보낸다. 마이클은 한나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고 기다린다. 하지만 한나는 쌓인 책을 밟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문맹이 주는 비극은 관객의 심금을 오래도록 울렸다.

단어와 단어가 연결되어 문장이 된다. 문장과 문장이 하나의 그림이 되고 의미가 된다. 글은 나의 마음과 생각을 세상에 알리는 기호이다. 글은 쓰고 읽는다는 수준을 넘어 문학적 작품이 되기도 한다. 영어권에서 영어를 모른다면, 한국에서 한글을 모르면 살아가기 힘든 것과 같다. 자신의 감정을 문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보다 답답한 일이 있을까.

근무를 마치고 어머니가 써서 보낸 글자대로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는다. 물건을 담을 때마다 어머니가 쓴 단어 하나하나가 띄워 쓰기 된다. 음식에 흰 설탕을 솔솔 뿌리는 어머니의 손길과 우유를 따라 마실 아이들과 올리브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는 계란프라이와 볶음밥이 만들어질 것이다.

어머니가 보낸 글자가 맛난 글자로 거듭난다. 표현은 서툴지만 진솔한 마음을 담은 글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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