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년 역사의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지난 2019년 대형 스캔들이 터졌다.
2017 월드시리즈 당시 우승팀 휴스턴 애스트로스가 전자기기를 사용해 상대팀 사인을 훔쳐 타석의 타자에게 전달한, 일명 ‘사인 훔치기’ 내막이 2년 만에 들통 난 것이다. 메이저리그는 더그아웃 내 전자기기 반입을 엄격히 금지하고, 사인 훔치는 것을 비신사적 행위로 간주한다. 휴스턴의 사인 훔치기가 메이저리그를 넘어 미국 전역을 충격에 빠트린 것은 그 방법의 교묘함과 비열함 때문이다. 전광판에 숨겨둔 고성능 카메라로 상대 포수 사인을 찍은 후 더그아웃에 몰래 설치한 티브이로 송출, 그리고는 양철 쓰레기통을 두들겨 타자에게 투수의 다음 공이 변화구인지 직구인지 소리로 알려준 것이다. 이 속임수가 만천하에 까발려지자 단장, 감독, 코치가 옷을 벗었고, 선수들은 사기꾼, 범법자, 배신자라는 비난 속에 경기를 치를 때마다 상대팀 투수로부터 빈볼을 맞는 신세가 됐다.
부정하게 얻은 정보를 활용해 이익을 얻는 모리배들은 메이저리그 말고도 어디에나 있다. 선생님 심부름하러 교무실에 갔다가 시험 문제지를 미리 보고는 백점 맞은 초등학생이야 따끔하게 훈계해 버릇을 고치면 되지만, 대입 시험이나 공모전 등에서 인맥과 돈을 이용해 출제 문제를 빼내거나 심사자를 회유하는 입시 비리는 도무지 근절되지 않는다. 자신이 속한 기업의 핵심 기술을 경쟁사에 넘겨주고 대가를 받는 산업 스파이, 군사기밀을 외부에 팔고 방산비리를 저지르는 군 장교와 군무원들도 있다. 증권가 내부에서 캐낸 정보로 서민 투자자들을 모아 한몫 크게 챙기고 빠르게 손을 뗀 애널리스트들 때문에 재산을 잃고 가정이 파탄 나고 스스로 목숨까지 끊은 이들이 어디 한둘인가. 내부 정보를 이용한 부당 편취는 억울한 피해자들을 양산한다. 정직하게 최선을 다해 온 이들의 시간과 노력과 꿈을 한 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그들을 절망에 몰아넣는 최악의 ‘인간 실격’이라 할 수 있다.
집단적 ‘인간 실격’의 실상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이 내부 정보망을 통해 신도시 계획을 사전 입수, 개발 예정지의 토지를 대규모로 사들인 투기 사건으로 온 나라가 들끓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슬로건인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나라”와 정확히 반대되는 불평등, 불공정, 불의 앞에 국민들은 분노와 허탈감을 감추지 못하는 중이다. 정부 합동조사단은 조사 결과 20명 정도의 직원이 투기에 연루된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는데, 그 말을 믿는 국민은 드물다. “니들이 암만 열폭(열등감 폭발의 준말)해도 난 열심히 차명으로 투기하면서 정년까지 다니련다. 이게 우리 회사만의 혜택이자 복지인데 꼬우면 니들도 우리 회사로 이직하든가”라는 한 인간쓰레기의 조롱 글에 담긴 사고방식이 한국토지주택공사 직원 다수가 가진 ‘LH 멘탈리티’, ‘LH DNA’라고 생각하면 한심하다. 내부 정보를 이용한 투기가 ‘혜택’이자 ‘복지’로 자리잡은 기업문화에서 투기 연루자가 20명에 불과할까? 수백 명, 아니 수천 명에 달할 것이라고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번 ‘LH 스캔들’은 임기 1년을 남긴 문재인 정부의 명운을 쥐고 있다. 공사 해체에 준하는 강력한 엄단이 있지 않는 한 문재인 정권은 불평등, 불공정, 부정의 시퀀스를 남긴 채 페이드아웃 되고 말 것이다. 정권 이미지 쇄신이 중요한 게 아니다. 정말 우려되는 건 불의와 부정의 낙수효과다. 얼마 전 대형마트 정육 코너에서 일하는 친구와 술 마시다가 “한우 좋은 부위 있으면 가격표 싸게 붙여서 좀 줘봐” 했다.
규정상 안 된다고 하자 나는 “야, LH 애들 해먹는 거에 비하면 고기 좀 싸게 먹는 건 장난이지. 우리는 그런 거라도 해먹어야 되지 않겠냐?” 우스개로 한 말이었지만, 이 사회가 정직하게 최선 다해 노력해봤자 협잡꾼들에게 다 빼앗길 수밖에 없는 구조라면, 정직이니 노력이니 양심이니 하는 가치들을 휴지조각처럼 구겨버릴 사람은 나 하나 뿐이 아니다.
사인 훔치기로 우승팀은 갈렸어도 승리한 휴스턴 선수들이나 패배한 LA 다저스 선수들은 다 고액연봉 받고 잘 산다. 스포츠는 양쪽의 정직한 노력과 열정이 서로 맞부딪는 경쟁일 때 아름답다. 그래봤자 삶의 축소판일 뿐이다. 삶이라는 싸움과 감히 그 규모와 치열함을 다툴 수 없는 작은 놀이터에 불과하다. 그렇다. 이건 삶의 문제다. 투기로 인해 삶이 추락해 산산이 부서지는 이들의 이름이 ‘국민’임을 기억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