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 우리가 저와 같아서 /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정희성 시인은 ‘저문 강에 삽을 씻고’에서 1970년대 고통받고 암울하게 살아가는 노동자의 삶을 이렇게 노래했다. 그 당시 공사판의 일용직 막노동자에게 삽은 없어서는 안될 생활의 마지막 밑천이자 꾸역꾸역 살아내야 하는 물리적 고통의 표상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저물 무렵 강변에서 삽을 씻으며 하루를 마감하면서 힘듦과 아픔 그리고 슬픔도 함께 씻어 버리려, 삽으로 퍼다 버리려 무진 애를 썼겠지. 그래도 삽을 씻고 돌아가서 보듬고 사랑을 나눌 식구가 있었고 좁다란 동네 골목 어귀 허름한 선술집이나 포장마차에서 탁한 술 한 잔 기울이며 노동의 고단함을 함께 삭일 이웃이 있어 숨쉴 구멍 하나쯤은 뚫려 있었으리라.
시인의 노래가 40여 년이 흐른 2020년 올해도 어느덧 해가 바뀌고 달이 기울고 날이 저물어 가고 있다. 그러나 이 저물어 가는 시간에 삽을 씻고 집으로 돌아가 쉴 수 없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퇴치와 감염자의 치료를 위해 삽보다 몇 배 무거운 장비들을 온몸에 칭칭 두르고 땀범벅의 한여름을 지나 한겨울 맹추위에도 땀을 흘리고 있다. 삽을 씻기는커녕 기진맥진하여 몸을 씻기조차 버겁다.
삽질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느 한구석에 처박힌 채 녹슬어버린 삽을 절박한 심정으로 고통스럽게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이들도 너무 많다. 씻을 삽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저물어가는 올해를 힘겹게 보내고 있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구정물 흐르는 샛강에라도 담그고 씻을 삽을 찾으려 우리는 얼마나 애타게 헤매고 다녔던가.
‘삽질하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삽으로 땅을 파거나 흙을 떠내다’라는 본뜻으로보다 ‘헛된 일을 하다’라는 속된 표현으로 더 자주 쓰인다. 그렇지만 올해는 헛삽질도 한 번 못해본 이들의 날들이 속절없이 지나가고 있다.
쥐의 해가 저문다. 왕성한 생산력과 부지런하고 활발한 달음질이라는 쥐의 표상을 좇고자 했던 우리 인간은 지금 하릴없이 ‘쥐 죽은 듯이’ 지내고 있다. 올해는 이렇게 가게 놔 두는 수밖에 딴 도리가 없을 듯하다. 그래도 그냥 있을 수만은 없다. 피리 부는 사나이를 불러야겠다. 그 사내에게 피리를 불게 하자. 부정의 쥐, 불의의 쥐, 탐욕의 쥐, 반목의 쥐, 질시의 쥐, 고통스러운 불황의 쥐를 저문 날 강물 속으로 퐁당퐁당 들어가게 하자. 거기에다 하나 더. 그 사내가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죄다 휘몰아 가면 좋겠다.
‘피리부는 사나이’는 독일의 하멜른 지역에서 전해 내려온 이야기로, 그림 형제의 동화로 우리에게 왔다. 이 동화를 영국의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은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라는 제목의 동시 버전으로 만들었다. 브라우닝은 이 버전에서 “너와 나는 사람들의 상처를 다독여 주는 사람이 되자. 그들이 우리에게 피리를 불어 쥐를 쫓아주겠다고 하든 안하든 우리가 약속한 것이 있다면, 그 약속을 꼭 지키자.”라고 말한다.
그래, 이제 삽을 씻고 희망을 품고 약속을 꼭 지킬 새해를 맞으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