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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광주를 만나다

등록일 2018-06-05 21:13 게재일 2018-06-05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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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박은주<Br>포항여성회장
▲ 금박은주 포항여성회장

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아마 중학생 2∼3학년 정도 되었던 것 같다. 늦은 밤 TV 다큐멘터리에서 충격적인 영상이 보도되었다. 손으로 채널을 돌리는 10인치 미만의 작은 화면에서 나온 영상은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내일 학교를 가야 한다며 빨리 자라고 재촉했고, 나는 그 영상의 실체가 궁금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작은 텔레비전을 안고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엄마의 잔소리를 피해 늦은 밤까지 다큐를 끝까지 봤다.

그건 바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과정의 미공개 영상이었다. TV를 보는 내내 “왜 우리나라 군인이 우리나라 국민들을 저렇게 때릴까? 왜?”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길거리에는 탱크가 멈춰 섰고, 군인들은 곤봉을 들고 길을 다니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때렸다. 피를 흘리고 쓰러진 사람들, 눈으로 봐도 믿겨지지 않는 충격적인 그 영상이 바로 5·18 민주화 운동을 처음 만난 순간이었다.

그 이후로 5·18 광주는 계속 이야기가 되었고, 새롭게 조명되었다. 하지만 일상에 쫓겨 살면서 광주는 가깝고도 먼 나라의 이야기가 되어 버린 것도 사실이다.

몇 달 전 5·18 광주 민중항쟁위원회에서 역사탐방 공모를 실시했다. 회원들과 함께 광주 역사탐방을 한번 다녀오면 좋겠다 싶어 응모했고, 포항여성회가 선정되었다. 그리고 토요일인 지난달 26일 34명의 회원들과 함께 광주로 향했다. 우리가 간 날은 광주의 청소년들이 오월 광주를 새롭게 조명하는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다음 세대인 청소년들이 광주의 아픔을 기억하고 계승하는 축제를 보면서, 아픈 역사를 다음세대에 전달하는 축제라는 형식이 새롭게 다가왔다.

우리 일행은 광주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옛 전남도청과 헬기 사격의 진위 여부를 따지고 있는 전일빌딩, 그리고 광주 시민들의 피로 얼룩졌던 금남로를 걸었다. 마지막으로 광주 민주화 묘지 참배로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자원봉사자들께서 친절하게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셨는데, 시민군의 마지막 안내방송 “시민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주세요” 라는 말을 할 때는 지금도 가슴이 떨려서 말을 잘 잇지 못하신다고 했다. 그 떨림은 듣는 우리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광주의 아픔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었다.

무엇보다 우리를 가장 아프게 했던 것은 광주 민주화운동 과정에 첫 희생자이신 고 김경철씨의 어머니와의 만남이었다.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나오다 곤봉으로 수도 없이 맞고 살려달라고 그렇게 빌었지만 결국은 차가운 주검으로 돌아온 아들의 처참했던 당시 모습을 회상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떨렸고, 듣는 우리들도 함께 울었다. 백일된 딸을 둔 아빠이기도 했던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악몽을 꾸신다고 하셨다. 그때 아버지를 잃은 손녀를 잘 키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버텨오셨다는 어머님은 “광주의 아픔을 잊지 말고 더 많이 알려 달라”고 신신당부하셨다. 그리고 나는 “너무 늦게 찾아와 죄송하고, 지금까지 제대로 몰라서 죄송하다”는 이야기로 죄송함을 대신하였다.

지금 광주에서는 옛 전남도청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당신의 아들과 딸, 남편과 가족의 피로 얼룩진 그곳을 허물기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이 광주를 기억하기 위해서 전남도청의 옛 모습을 복원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달라고 당부하셨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꺼이 함께 하겠다고 약속을 드리고 돌아오는 길은 무겁고 슬프지만은 않았다.

오월 광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광주의 아픔은 치유되지 않았다. 국가가 국민에게 행한 폭력에 대해선 더 정중히, 그리고 더 진실하게 사죄하고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을 호도하고 지역감정이란 이름으로 폄훼했던 그 수많은 시간도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이다. 아직 오월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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