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있다. 중국 송대(宋代) 중현이라는 인물이 당대 대표적인 선문답을 정리하고 저술한 ‘벽암록(碧巖錄)’에 나오는 말로, 그 뜻이 참으로 오묘하다. ‘알 속 병아리가 때가 되어 밖으로 나오고자 할 때, 껍질 안쪽을 쪼는데 이를 ‘줄(啐)’이라 하고 어미 닭이 그 소리를 듣고 새끼가 잘 나올 수 있게 알을 쪼아 돕는데 이를 ‘탁(啄)’이라고 한다. 이 줄(啐)과 탁(啄)이 동시에 이뤄져야 뜻하는 바가 성취된다는 말이다.
세상에는 지(知)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수많은 병아리들이 있다. 그리고 이들은 나름대로 저만의 소리를 내며 알껍데기를 쪼아대기 마련이다. 어떤 병아리들은 큰 소리로 규칙적이게, 어떤 병아리들은 쪼아대다가 지쳐 잠시 멈추기도, 또 어떤 병아리들은 나름 최선을 다하지만 힘에 부쳐 그 소리가 미약할 때도 있는 등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모두 자신만의 역량대로 소리를 내며 껍질을 깨려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런데 껍질 ‘안’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아우성은 사실 ‘잘’ 들어야 한다. 안에서는 열심히 쪼아대는데, 밖에서 ‘잘’ 듣지 못하면 그것은 ‘소음(騷音)’이 되거나 ‘무음(無音)’이 되기 쉽다. 소음이 되면 그 소리를 안 듣고 싶은 마음에 화를 내거나 강압적이 되기 쉽고, 무음이 되면 소리가 들리지 않기에 스스로 잘못된 길을 가는 줄도 모르고 그대로 가다가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다. 전자는 지(知)를 추구하는 병아리들을 위축시켜 껍질을 깨고 나올 가능성을 죽이고, 후자는 무반응, 소통불가 상황 속에서 이들을 지쳐 떨어져 나가게 만든다.
의사는 환자의 신음소리를 잘 들어야 이를 낫게 할 수 있고, 고용주는 노동자의 절규에 찬 목소리를 잘 들어야 원만한 노사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한 나라의 지도자는 온 국민의 진정 어린 외침을 잘 들어야 국가 정책의 방향성을 제대로 수립해 나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스승은 제자들의 다양한 소리를 제대로 들어야 올바른 깨우침의 길을 열어 줄 수가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잘’ 듣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미국의 유명 작가인 윌리엄 아서 워드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평범한 교사는 그저 말을 하고, 좋은 교사는 설명을 하며, 훌륭한 교사는 스스로 모범을 보이나 위대한 스승은 영감을 준다”라고.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는 스승들은 가슴 속 깊이 제자를 향한 따뜻한 참사랑이 그득한 이들이다. 그렇기에 제자들의 소리를 소음이나 무음이라 하지 않고 소리마다의 특색에 ‘귀’를 잘 기울이려고 한다. ‘잘’ 듣는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스승’의 마음은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나를 제대로 알고(知己), 제대로 닦고(修己), 또 완성하려는(成己) 노력을 부단히 해야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요즘 지식이 많은 선생은 넘쳐나도 지혜와 사도(師道)를 갖춘 ‘참스승’은 매우 아쉬운 시대다. 모범을 보여야 할 스승이 잘못된 행동으로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에 휘말리질 않나, 취업만 시키면 인성이고 나발이고 전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교육자가 있질 않나, 지도교수라는 명목으로 제자들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한심한 인사가 있지 않나, 세상은 참으로 요지경이다.
바야흐로 5월은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 생각해야 할 이들이 참으로 많은 풍성한 달이다. 이러한 날들이 ‘~를 위한’ 날들이 아니라, 진정 ‘~다운’ 날들이 된다면 어떨까. 어린이답게, 어버이답게, 스승답게. 이 중 스승답다는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도 열심히 줄(啐)하고 있을 수많은 병아리들을 위해 제대로 된 ‘귀’를 갖고 제때 ‘탁(啄)’하려고 하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