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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유감(壁畵有感)

등록일 2018-05-01 21:46 게재일 2018-05-01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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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영재포항예총 회장
▲ 류영재포항예총 회장

봄바람에 꽃잎이 눈처럼 날리던 날, 어느 초등학교 옆을 지나다 벽화작업에 열심인 학생들을 보았다. 긴 막대기 끝에 로울러를 매달아 능숙한 솜씨로 하늘과 구름을 표현하는 사람은 지도교사인 듯하였고, 덩치보다 훨씬 큰 일회용 작업복을 입고 저마다 작은 손에는 페인트 붓을 든 학생들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고도 귀여워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필자가 미술교사이던 시절 아이들과 함께 벽화작업을 하던 모습이 오버랩 되며 만감이 교차하였다. 골목길 담장에 페인트로 그림 그리는 일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미술중점학교라는 특별한 시스템을 운영하다보니 아이들에게 벽화체험 기회 제공이라는 이유로 몇 점의 벽화를 남기게 되었다. 벽에 그림을 그리는 일은 주변환경을 아름답게 꾸미자는 것인데, 과연 바람직한가에 대한 의구심은 지금도 여전하고, 내손으로 남긴 벽화들과 마주칠 때면 마음이 영 개운치가 않다.

우리나라에 벽화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십여 년 전이다. 도시마다 계획적인 신도시 개발 바람이 불자 원도심은 쇠락하였고, 필연적으로 뒤따라 온 공동화 현상을 해소하기 위한 고민이 시작되었으며, 벽화는 그 과정의 산물이다. 도시재생사업에 예술가들의 창의성을 접목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시도였으며, 그 중 손쉬운 것이 벽화였던 것이다. 특히 통영 동피랑마을 벽화의 성공에 고무되어 각 도시의 벽은 물론 한적한 시골에까지도 재능기부, 봉사활동의 이름으로 벽화열풍이 불어 닥쳤다. 이듬해쯤 문체부 주관의 공공미술프로젝트에 부산 안창마을 벽화사업이 선정되어 호평을 받자 부산시내 곳곳에는 벽화마을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연간 10만이 넘는 관광객이 찾아 유명 관광지가 되어버린 감천마을을 비롯하여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변호인’의 촬영지로 이름난 흰여울마을, 깡깡이마을의 벽화 등 필자가 다녀온 곳만 해도 여러 곳이며, 제법 알려진 벽화마을만도 스무 곳이 넘으니 놀랄 일이다.

인류 역사에서 벽화는 매우 중요한 유물이다. 인류 사고의 시원인 구석기시대, 저 유명한 ‘라스코 동굴벽화’와 ‘알타미라 동굴벽화’는 문자가 없던 시대에 문자를 대신하여 그들의 간절한 기원을 담았으니 선사시대 인간의 사고체계와 행위양식을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해주는 매우 소중한 유적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벽화 역사도 결코 만만치 않다. 신라인 솔거는 황룡사의 벽에 ‘노송도’를 그려서 새들이 진짜 소나무인줄 알고 앉으려다 부딪혀 떨어지곤 하였다는 이야기가 기록으로 남아있을 정도로 신라인의 미적 표현력이 뛰어났음을 알려주며, 고구려의 승려화가였던 담징이 일본에 건너가 호류지(法隆寺)에 그렸다는 ‘금당벽화’는 동양 3대 미술품 중 하나로 평가될 만큼 가치가 높게 인정되고 있으니 벽화는 우리 역사에서 훌륭한 예술장르였던 것이다.

개별적 삶의 물리적인 경계인 동시에 공공의 시작인 외벽을 그림으로 장식하는 것은 멋진 일이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는 법이니 벽화에 대한 찬반 논란 또한 자못 뜨겁다. 분명한 것은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벽면을 장식하는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공공미술의 경우는 그 작품이 곧 ‘장소성’을 획득하게 되므로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장소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결여되었거나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값싼 페인트로 조악하게 그려진 벽화는 오히려 풍경을 망치기 일쑤다. 형식이나 내용에 대한 충분한 연구와 고민이 뒷받침되어야 함은 물론이며 재료의 선택 또한 매우 중요하다. 무분별하게 그려진 벽화는 얼마 지나지 않아 흉물로 변할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그건 공공미술이 아니라 공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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