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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의 한계

등록일 2017-08-10 21:12 게재일 2017-08-1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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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형<br /><br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여느 해보다 뜨거운 입추(立秋)가 지나고 있다. 또 한 철이 지나려는 모양이다. 철없는 인간들이 지난 시간들을 지우기 위해 난리법석을 피우고 있다면, 자연은 할 말 많은 2017년의 모든 이야기를 새기느라 한창 열을 올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여름이 이다지도 뜨거운지 모르겠다. 자연이 만드는 2017 나이테는 분명 어느 해보다 굵고 진할 것이다. 왜냐하면 낯섦, 억지, 엄포, 복수 등 철없는 사회의 새로운 불통 모습을 다 기록해야 하니까.

지금의 기록적인 더위는 광장 밖 국민들의 실망 지수와 비례한다. 광장의 촛불로 탄생한 정권답게 돌아가는 모든 사회 시스템들이 촛불에 맞춰져 있다. 촛불 정부, 촛불 국회, 촛불 경제, 촛불 교육, 촛불 검찰, 촛불 법원, 심지어 촛불 시민 등 촛불만 넣으면 어지간해서는 다 말이 된다. 촛불의 힘으로 현 정부에서 입신(立身)한 촛불 찬양자들이 나라의 요직에 앉아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다 이해는 되지만, 분명한 것은 마음의 등불을 킨 광장 밖 대다수의 국민들이 느끼는 촛불에 대한 피로도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촛불 혁명이라고 했을 때 정말 뭔가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없다. 새로운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숫자 놀이인 여론 조사 결과를 믿지는 않지만, 그래도 뭔가 다를 줄 알았다. 용서, 화해, 상생 같은 것은 기대도 않았다. 다만, 힘들고 어렵지만 열심히 사는 국민들을 위해 정말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낼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다. 지금까지만 보면 과거 캐기와 좀 더 있는 사람들 것을 거두어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전부인 것 같다. 특히 후자의 모습은 홍길동과 너무 닮았다. 나눠주겠다는데 싫어할 사람은 없다. 촛불 정권에서는 나누어줄 것을 마련하는 방법을 어려운 창조(創造)보다는 정말 쉬운 `모래 빼앗기 놀이`에서 찾았다. 그리고 잡음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모래를 좀 더 가진 사람들을 탐관오리와 같은 인간들이라고 몰아세웠다. 그래야만 가져가는 것(?)이 정당한 일이 되니까. 또 겁먹은 자들이 스스로 더 많이 내놓을 것이니까.

정권이 바뀌면서 좀 더 가진 사람들에게는 거의 다 “갑”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졌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은 “갑질”로 치부되어 타도(打倒)의 대상이 됐다. 그들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게 모래성을 쌓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고 하지 않는다. 단지 갑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졌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그들을 비난하며, 그들에게 돌을 던졌다.

언론들은 시범타로 걸린 몇몇 사례들을 가지고 그들을 최악의 범죄 집단으로 몰아세웠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니 뭐니 하는 논리 따위는 통하지 않았다. 그동안 돈과 힘에 상처받은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통쾌해 했다. 그 모습에 자극받은 언론과 정부는 더 자극적인 내용을 찾기 위해 과거를 이 잡듯이 뒤지고 있다. 그리고 어느 영화처럼 시민들의 반응이 식을 때마다 전혀 새로운 것인 양 호들갑을 떨며 터트린다. 그러면 이 나라는 또 금방 뜨거워진다. 지금 사회 모습을 보고 누군가는 서구 열강들의 각축장(角逐場)이 되었던 구한말 같다고 했다. 우리나라 일을 우리가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하는 꼴을 보면, 또 내로남불 격으로 자신들은 자국의 안전을 위해 핵 항공모함이다 뭐다 오만 것들을 다 만들면서 다른 나라는 절대 안 된다고 하는 꼴을 봐서도 그렇기는 하다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필자는 그보다 우리사회가 홍길동과 활빈당이 활개를 치던 시대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홍길동이 있다면 묻고 싶다. “있는 사람들 것을 다 털었을 땐 그 다음은 어떻게 할 것인지?” 아마 홍길동이 있다면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을까. “백성들은 직접 고기를 주는 것보다 마음껏 잡을 고기를 마련해주는 것을 원했다.” 부자 증세(增稅)에 이어 어쩌면 곧 “국민 증세”라는 말이 나올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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