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을의 이름은 그 마을이 흘러온 역사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지명은 하나의 명사가 아니라 그 마을의 특성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아주 긴 호흡의 생생한 문장이다.
포항시 남구 동해면 도구리에는 우물재라는 곳이 있다. 마을 곳곳에 시원한 물이 솟는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는데 참 예쁘고 정감이 가는 지명이다. 동해면에는 약초밭이 많아 약전(藥田)이라 부르고, 우뚝 선 바위가 있다하여 입암(立岩)이라 불리어진 마을도 있다. 발산(發山)이라는 마을은 봄이면 산과 골짜기에 꽃이 가득 핀 모습에서 유래되었다하니 자연과 사람은 긴 세월을 더불어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본래의 의미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로 삶의 방식이 재편되고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면서 지명은 그 지역의 특징을 잃었다.
우물재의 빈 집터에는 잡풀이 무성하다. 담벼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있는 장롱들, 살짝 열린 문짝 사이로 길고양이가 들락거린다. 골목을 천천히 걷다보니 사용하지 않은 우물이 하나 눈에 띈다. 집집마다 상수도 시설이 놓이면서 효용성이 사라진 우물의 흔적만 남아 있다. 우물터에 나와 물을 길으며 서로의 안부도 묻고 웃음꽃을 피웠던 사람들의 추억은 어디로 갔을까? 우물가에 우두커니 선 고목은 자신의 몸에 두레박이 걸렸던 기억만을 허공에 걸어두고 늙어가고 있다.
폐허가 된 우물재의 골목에서 근현대사의 아픈 시간의 흔적들이 느껴진다. 6·25 전쟁이후 인근마을에 미군주둔지가 조성되면서부터 이 마을에는 술집들이 형성되었다. 미군부대는 철수했지만 술집들은 그대로 남아 장사를 하였고 마을은 더욱 낙후되었다. 현재 유흥업소들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우물재라는 마을 이름은 본래의 의미를 잃고 사창가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황석영의 소설 중에 파월역사를 이야기한 단편소설이 있다. 주홍글씨처럼 각인된 우물재의 이름에서 파월이라는 역사의 한 문장을 본다. 베트남전쟁에 우리 젊은이들이 참가한 것도 결국 평화의 명분으로 목숨을 담보로 한 약소국의 비애였을 것이다. 전쟁, 인간성 상실과 잔흔들. 우물재의 낙후된 모습도 치유해야 할 전쟁의 상흔 같다.
군부대훈련소 옆으로 해안둘레길 공사가 한창이다. 포항시에서는 우물재를 철거하고 공원으로 만드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한다. 기존의 폐허된 골목을 허물고 또다시 건물들을 지으면 현재의 모습은 변화될 것이다. 광장을 만들고 조형물들을 세울 계획이라 하니 지나온 시간 위에 또 다른 시간의 역사가 더해지겠지만 과연 건물들만 철거한다고 아픈 과거도 철거되는 것일까? 공원이 생기면 깨끗한 공간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철거보다 더 우선이 되어야 할 것은 부끄러운 역사일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고 다시 되풀이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6·25 전쟁 뒤 미군의 주둔과 철수가 이뤄진 마을들은 우물재와 비슷한 아픔을 가지고 있다. 용기있게 상처를 드러내는 것은 아픈 과거를 반복하지 않는 하나의 방법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물재는 문학작품이 쓰인 배경과 역사적 아픔을 새롭게 재조명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우물재에서 바다로 나와 걸으니 먹먹하던 마음이 좀 가벼워진 듯하다. 역사와 인문학적 이야기가 담긴 치유의 산책로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우물재의 낙후된 모습은 수치스러운 과거가 아니라 약소국의 비애가 담긴 아픈 역사인 것이다.
우물재의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미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문화는 건강한 삶을 만든다. 행복지수가 높을수록 삶은 윤택해질 수 있다. 폐허가 된 공간뿐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가는 모두가 치유될 수 있는 우물재의 변화를 기대해본다. 골목골목 새로운 문화가 꽃을 피우고 마을 곳곳에 예술의 영감이 살아있는 건강한 우물재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