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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소리

등록일 2017-06-02 02:01 게재일 2017-06-02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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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병래 수필가
▲ 김병래 수필가

개구리소리를 들으러 간다. 마을의 불빛과 소음을 벗어나 멀리 들판 가운데로 간다. 모내기철이라 물을 가득 실은 논배미마다 개구리소리가 요란하다. 초여름 밤 무논에서 개구리소리가 들리는 건 당연한 일인데, 그 당연한 것이 더없이 반가운 것은 부당한 일들이 너무 많은 세상 탓일까.

개구리소리를 들으러 가는데 술을 빼놓을 수 없다. 초여름 밤의 흥취를 돋우는 데는 아무래도 막걸리가 제격이다. 먹다 남은 오이나 풋고추에 된장 한술, 가다가 가게에 들러 막걸리 한 병을 사면 준비 완료다. 벗이 있어 동행을 해도 좋지만 혼자서 쓸쓸함을 벗하는 것도 못지않은 일이다.

오늘은 그믐밤이라 아쉽지만, 때마침 휘영청 달이 밝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동서고금에 달을 쳐다보며 한숨짓고 하소연한 사람은 무릇 기하며, 달을 벗하여 술잔을 기울인 사람인들 얼마나 많을까. 그러니까 달은 동서와 고금을 잇는 무선 인터넷인 셈이다. 사람의 기술이 아무리 발전한들 세상 온갖 사연들이 담긴 달의 메모리용량을 어찌 따를 것인가. 그 옛날 이태백의 술벗이었던 달이야말로 마주하고 술잔을 기울이기에 더없는 벗이 아닌가.

들판 적당한 곳에 신문지를 깔고 멀리 보이는 마을의 불빛을 등지고 앉는다. 어차피 그믐밤에도 이제는 옛날처럼 칠흑의 어둠이 아니지만 가급적이면 인공의 불빛을 보지 않는 게 여름밤의 운치를 덜 깨는 일이다. 인기척에 잠시 멈칫했던 개구리소리가 하나 둘 살아나서 갈수록 구성지다. 달이 없는 대신 더 총총하고 영롱한 별빛이 대형 멀티비전 같은 무논에 얼비친다.

비록 풋고추 몇 개에 막걸리 한 병의 술자리지만, 나는 시방 어느 왕후장상이나 재벌의 호화찬란한 주연(酒宴)이 부럽지가 않다. 아무리 많은 돈과 기술을 동원해서 연출한 분위기라 한들 이 초여름 밤 들녘의 정취에 미칠 것인가. 나는 지금 저 하늘과 무논의 별빛, 풀냄새 흙냄새를 실어오는 훈풍과 수천수만 개구리들의 코러스에 물아일체로 어우러져서 우주적으로 한 잔 하는 것이다.

실의와 방황의 젊은 날에는 개구리소리를 맞으러 다니기도 했다. 삭신이 결리고 찌뿌드드할 때 폭포수 아래로 물 맞으러 가는 것처럼, 밤새도록 들판을 쏘다니면 개구리 소리에 실컷 두들겨 맞곤 했다. 그 시절에는 개구리소리가 참으로 무성하고 우렁찼다. 온 들녘이 떠내려갈 듯 악을악을악을악을…. 악을 써대는 듯한 개구리소리에 몸과 마음을 내맡기고 있으면, 방망이질에 흠씬 두들겨 맞고 찌든 때를 게워낸 빨래처럼 마음이 한결 개운해지는 거였다.

개구리소리를 한갓 단조로운 가락의 소음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때론 이 땅이 들려주는 질책의 소리였고 한편으론 더없는 위무의 소리이기도 했다.

내가 나약하고 소심할 땐 꾸짖고 나무라는 소리였고 아프고 슬플 때는 다독이고 위로하는 소리였다. 그리고 때론 좌절과 자괴감과 허망과 무력감에 빠지게 하는 세상의 온갖 논리와 위세들을 무산시켜버리는 무진설법이기도 했다.

초로에 접어든 지금까지 나는 매년 초여름 밤중에 들판으로 나가 개구리소리를 들으며 술잔을 기울이는 걸 연중행사로 해오고 있다. 방황과 고뇌의 젊은 날을 지나 불혹과 지천명과 이순의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개구리소리도 많이 달라졌다. 공해 때문에 그 수가 현격히 줄어들기도 했지만 개구리소리를 듣는 내 귀도 전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이 들판의 개구리소리도 나와 함께 늙어가서 수명을 다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밤공기가 서늘하게 식고 술병도 바닥이 났다. 인생을 이해하려 것이 아니라 취하려 왔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나도 오늘밤 막걸리에 취하고 하늘과 들판과 개구리소리에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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