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끝을 스치는 바람이 차갑지만 상쾌하니 좋다. 봄바람이다. 기온이 많이 올랐는지 멀리 공터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매화가지는 푸른 하늘에 곱게 꽃수를 놓아 허공의 침묵을 깨우며 환하게 웃는듯하다. 한낮의 햇볕이 좋아서 좀 걷기로 했다. 겨우내 걸치고 다니던 외투가 갑자기 무겁고 칙칙하게 느껴진다. 봄옷으로 갈아입어야지 마음먹으면서도 아침 기온이 쌀쌀해서 하루만 더, 하루만 더하며 미루다 오늘도 두꺼운 겨울옷을 입고 외출을 하게 되었다.
꽃샘추위에 꽃들이 피는 것을 보면서 봄이 왔음을 안다. 양지바른 곳에 피어있는 노란 꽃에 눈길이 머문다.
영춘화(迎春花)다. 한자이름을 풀어보면 `봄맞이 하는 꽃`이라는 뜻을 가졌다. 언뜻 개나리와 닮았으나 꽃피는 시기가 개나리보다는 좀 이르다. 노란빛에 마음이 설렌다. 잎보다 먼저 꽃을 피우는 매화처럼 봄이 옴을 알려주는 꽃이다. 겨울의 혹한 속에도 노란꽃을 피워낸 영춘화가 대견하다. 잎도 없는 마른가지 끝에 핀 꽃을 보면서 봄이 왔음을 새삼 느낀다. 느긋하게 봄을 느끼며 `봄`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맨 처음 누가 계곡의 얼음물이 녹고, 꽃이 피고, 싹이 돋는 이맘때를 봄이라 부르기 시작했을까?
봄에는 천지사방 볼 것들로 넘친다. 봄에 피는 꽃들은 다양하고 화사하다. 해마다 찾아오는 봄이지만 늘 새롭고 설렌다. 많은 것들을 보라고 `봄`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들은 적이 있다. 참으로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물론 그 어떤 국어사전을 뒤져도 나오지 않는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겠지만 아마 봄은 `보다`라는 동사에서 생겨났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바라보고 인식되어지면서 존재함을 느낀다. 꽃을 바라보며 봄이 왔음을 새삼 느끼는 것처럼 사물이든 사람이든 서로 바라볼 때라야 비로소 그 존재를 새롭게 알게 된다.
`봄-보다` `보다-봄`이라고 쓰고 읽어보니, 오랫동안 보지 못하고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그리운 얼굴들이 꽃처럼 피어난다. 이름들을 불러본다. 자연의 시간에서는 피는 꽃을 보면서 겨울이 지나 새봄이 오는 것을 느끼지만, 인연의 시간에는 언제가 봄일까? 설레듯 서로를 바라보는, 그 첫 순간이 아닐까?
어느 한 존재가 일방적으로 한 존재를 바라보는 것은 진정한 `봄(見)`이 아니다. 서로 마주보아야 봄이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눈을 마주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인연의 시작이며 제대로 된 `봄(見)`이다. 그렇다고 모든 만남이 봄(春)처럼 활짝 꽃을 피우는 것은 아니다. 봄기운처럼 따스한 눈길로 자주 보아야 마음이 활짝 열리는 것이다.
따뜻한 사람들과의 만남은 늘 설렌다. 그런 설렘은 오래된 만남 일수록 더 깊고 진한 향기의 꽃이 핀다. 살아가면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처음 만났을 때는 서로 `봄(바라봄)`의 과정을 거친다. 본격적인 탐색단계인 셈이다. 하지만 그 단계를 지나고 나면 `봄`은 한층 깊어간다. 사람이 사람을 안다는 것은 수없이 많은 `봄`을 필요로 한다. 첫인상에서 그 사람을 다 알 수 없듯이 자주보고 만남으로써 서로를 알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이해하고 나아가 서로 사랑하게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연은 인간에게 평생을 살아갈 수 있는 귀한 봄의 선물이 된다.
따뜻한 봄에는 꽃들이 활짝 핀다.
자연의 시간이든 인연의 시간이든 살아가면서 `봄`을 잃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꽃샘추위를 이기고 저마다 가장 고결한 꽃을 피우는 봄꽃의 마음을 배우고 싶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지난 `봄`도 있지만 내가 노력하면 다시 찾을 수 있는 `봄`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매순간 `봄`을 잃지 않는다면 세상은 분명 봄꽃이 만발할 것이다. 가장 귀한 봄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그 봄에는 가장 귀한 꽃이 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