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상시가 국정 농단을 일삼던 후한의 영제(집권 168~189년)시기 중앙정부는 지방할거를 막겠다고 지방장관인 자사의 명칭을 주목으로 바꾸고 이 주목이 군사감독관인 감군사자를 겸하도록 했다. 이 정책은 중앙집권이 약화되고 지방할거를 더욱 촉진시킨 결과를 가져왔다. 지방 호족들이 황제 권력을 위협하는 상황 속에서 황궁의 십상시는 황제권력을 사수하기보다는 자신들의 권력 장악에만 전념하면서 국가나 황실의 운명을 내다보는 거시적인 안목은 없었다. 이들은 황제가 그저 유흥에만 빠져있기를 희망했다. 이들의 대표 격인 장양(135~189년)은 열두 살부터 환제를 주군으로 모셨다. 자신보다 세 살 많은 환제와 친구처럼 지내면서 황제의 측근으로 부상한 그와 환제의 관계는 단순히 신하와 주군을 떠나 동성애를 나누는 사이로 변하였다.
이 불륜관계는 순제 부인인 양태후에 의해 발각됐으나 태후는 이 사실을 발설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장양의 약점을 빌미로 태후는 정적인 환제의 동향을 감시하도록 했으나 장양은 결국 환제에게 돌아갔고 후에 장양은 양씨 외척을 몰락시켰다. 환제의 죽음을 계기로 두 명의 황제가 1년도 안 돼 교체되고 뒤이어 열세 살의 어린 영제가 황제로 등극하자 이를 이용해 권력을 잡은 것은 황제보다 21세 연상인 장양을 비롯한 십상시였다. 영제가 죽자 십상시는 정치적 도전에 직면했고 위기를 타개할 목적으로 `십상시의 난`을 일으켰다가 결국 실패한다. 후한서 `장양열전`에 따르면 십상시는 열 명이 아니라 열두 명이며 편의상 열 명으로 묶고 십상시라 부른 것이다. 장양은 황하에 뛰어들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의 내시도 엄연히 품계와 관직이 있는 전문직 공무원이었다. 내시의 품계는 종2품인 상선, 정3품인 상온·상다·상약에서, 종9품인 상원까지 직책이 다양하다. 최고직인 상선 내시의 경우는 종2품이었으니 오늘날 차관급에 해당하는 고위직이다. 궁궐 안에는 내시들이 업무를 보는 관청인 내반원이 있었다. 내반원은 임금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내시의 업무성격상 왕이 계시는 처소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내시의 숫자는 `경국대전`에 140명으로 규정되어 있었으나, `대전통편`에 가서는 그 수효가 일정하지 않고 그때그때 왕의 뜻에 따라 정하도록 변동됐다. 내시의 근무 형식은 비교적 장기간 궁궐에 머물면서 근무하는 방식인 장번내시와 교대로 궁궐을 출입하면서 근무하는 방식인 출입번내시가 있었다.
김종직(1431~1492)은 성종의 전교를 받아 내반원의 연혁과 기능을 기록한 `내반원기`를 남겼다. `성종실록`에 `승정원에 전교하여 내가 일찍이 대루원기와 내반원기로서 여러 신하와 내관을 경계시키려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성종이 내시들의 기강을 잡기 위해 이 글을 짓게 했음을 유추할 수가 있다. 김종직은 내반원기에 내시의 임무에 대해 자세히 적고 있으며 중국 역대의 내시로서 모범적으로 활동한 인물들로 한의 사유로부터 시대별로 송의 장무칙까지 소개하였다. 또한 `충성되고 정직한 내시와 아첨하고 간사한 내시가 시대마다 각각 있었으니 그 중에서 착한 사람을 가려 본받고, 착하지 못한 자를 경계로 삼는 것이 가하다`고 하면서 내시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언급했다. 특히 내시의 권력화는 국가를 위기에 빠뜨린다는 점과 이에 대한 경계도 잊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왕의 측근임을 빙자해 재물을 긁어모으고,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고서 방자하고 거만하게 굴면 감히 막을 자가 없게 됐다`라고 했으니 내시의 권력화를 경계한 이 글이 오늘날 결코 낯설지만은 않게 느껴진다.
후한의 십상시외에도 진의 조고와 같은 환관세력, 당의 양귀비, 조선의 장녹수 같은 경국지색, 종교인으로는 고려 말 공민왕 때의 신돈 등 이 모두 우매한 지도자가 사악한 무리들에 현혹되어 정도의 정치를 버렸기에 나라가 망한 사례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