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세월따라 변하게 마련이다. 대체로 세태의 변화는 가랑비 옷 젖듯 하여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어, 언제 이렇게 변했지?`하며 깜짝깜짝 놀라곤 하는 법인데, 오늘날은 그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마치 다큐멘터리의 오버랩 화면을 보는 듯 휙휙 변해가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기계문명의 눈부신 발전은 세대차를 단순한 연령의 차이가 아니라 문명의 발전에 쉽게 적응하는 스마트한 세대와 그렇지 못한 세대로 구분하여 소위 `아재`라는 신조어 아닌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시대의 빠른 변화만큼 사회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풍속도를 만날 수 있다.
문화예술은 어떤가?
얼마전 나흘을 꼬박 집에서 보낸 적이 있다. 심한 몸살로 코밑이 보기 흉하게 헐어 밖에 나갈 처지가 못 되었던 것이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아무것도 않고 드러누워 최근 종편TV에서 방영되어 대박이 났다는 `도깨비`란 드라마의 재방송을 이틀에 걸쳐 첫 편부터 끝까지 보았다. 드라마 `도깨비`는 전래동화를 바탕으로 창작된 판타지다. 비슷한 시기, 공중파TV에서도 전생과 현생을 넘나드는 `도깨비`와 비슷한 형식의 판타지 `푸른 바다의 전설`이란 드라마가 인기였다. 후속편 드라마 `사임당`도 비슷한 형식이 도입되었음을 예고편에서 알렸다. 과학문명이 이처럼 발달한 시대에 어째서 전생과 현생이란 장르의 판타지가 대세일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오늘날의 문학에서 톨스토이나 헤밍웨이의 진중함이 사라지고 판타지가 대세가 되었듯이 음악도 베토벤이나 모차르트가 아니라 퓨전음악, 실용음악이 넘쳐나는 세상이며, 미술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반 고흐의 치열한 예술정신은 전설이 되었고 오늘날의 청소년들은 만화, 애니메이션에 열광한다. 이른바 포스트 모던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이전의 사조들처럼 일관된 형식을 가진 이념이 아니라 모더니즘 이후의 예술판에 나타나는 제 현상을 이르는 용어이다. 영웅이 없는 시대의 예술, 베토벤이나 톨스토이 같은 불세출의 영웅이 아니라 개개인의 다양한 기호, 가벼움, 기발함, 즐거움 등에 기반한 독창성의 추구가 그 특징이다.
아재 세대들의 대학시절에서 낭만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으나 대학에서 낭만이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되었고, 대학 캠퍼스에 인문학 또한 실종된 지 오래이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오직 대학진학을 위한 공부만 하다가 대학에 입학하면 1학년 때부터 취업준비를 시작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보니 대학 캠퍼스에서조차 낭만이 전근대적인 사고쯤으로 취급당하는 것이다. 교육부의 대학 평가에서 취업률이 중요한 항목이며, 그 결과에 따라 지원금이 달라진다고 하니 대학마다 취업에 불리한 인문학이나 예술분야의 학과는 폐과 수순을 피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미술대학에서 주류를 이루었던 회화과, 특히 한국화 학과는 대부분 폐과되고 실용미술인 디자인학과 일색이다. 심지어 의과대학의 경우도 질병이나 사고로부터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내과, 외과보다는 성형외과, 피부과 등 미용에 관계되는 분야가 인기라 한다. 세태가 그렇다보니 의사도 땀흘려 사람 생명을 구하는 진정한 의사는 만나보기 힘든 세상이 되고 말았다.
걱정이다. 그러나 걱정할 일이 아니기도 하다. 인간의 본성에 작용하여 세상을 정화하는 인문학과 예술의 힘이 여전함을 믿어보자. 새 시대의 청춘들과 새로운 예술을 가볍다 타박하지 말고 긍정의 눈으로 바라보자. 다양함을 인정하고 큰 눈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려 노력하자. 새로운 길을 걷다보면 성공도 실패도 있을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새로운 장르가 창조되는 법이다.
황금만능의 척박한 세상, 영혼의 목마름을 해갈하는 수단은 물질이 아니라 정신임이 분명하다. 인문학과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에 인색하지 말자. 독서를 통한 사유와 자기 성찰, 그리고 문화예술의 향유를 통하여 영혼의 샘이 더욱 깊어지기를 기대하며 새 시대의 예술이 어디로 가는지를 유심히 지켜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