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연구에 의하면 인성은 절반 정도가 이미 태어날 때 타고 나는 것이라 한다. 그 나머지의 반은 6세 정도까지 가정환경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고, 이후 평생 동안의 교육이나 경험에 의한 인성 변화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고 한다.
나는 원래 개를 싫어했다. 개띠로 태어났으니 개와 인연이 있을 법도 하건만 그냥 싫어한 정도가 아니라 무서워했다는 편이 더 옳을 것 같다. 개를 싫어하는 마음을 타고 났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릴 때 개에 물린 기억이 있고, 대학시절에도 한 번 물린 적이 있으니 후천적 트라우마로 개를 싫어하기도 한다.
오늘날에는 동물사랑이 현대인의 기본적인 덕목쯤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특히 인간과 삶을 함께하는 반려동물은 극도로 핵가족화, 개인화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매우 유용한 수단이 되었다. 그렇지만 장군이 엄마가 반려견 노래를 부를 때 마다 절대 안 된다며 단호히 반대해온 까닭은 앞서 말한 사연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날 늦은 시간에 귀가하니 거실에 조그만 강아지 한 마리가 있었다. 지금은 장군이 엄마라 불리는 사람이 친구에게서 분양받아 온 것이라 했다. 그놈이 장군이다. 몇 해가 지나니 이름처럼 장군같은 덩치가 되어 아파트에서 함께 생활하기가 버겁지만 이미 가족이 되어버렸으니 어쩌겠는가? 기가 막힐 노릇은 이 녀석이 가족이 된 후 우리 집안에 묘한 서열이 생겼는데, 언제나 장군이가 중심이니 항상 내가 마지막 순서다. 말하자면 개보다 못한 처지가 된 것이다.
서열, 이 촌스런 질서에 익숙치 못한 사람들은 이 문제로 고민스러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예술행사를 주관하다 보면 수준 높은 예술프로그램을 만들고 다듬고 구현하는 일보다 의전 때문에 당혹스러운 경우가 더 많으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의전을 형식이라 치부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겠으나 이 형식이 바로 전통예절의 근본이니 만만치 않은 일이며, 더러는 이를 소홀히 하여 괘씸죄에 걸리기라도 하면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예총회장이란 직책을 맡고 보니 생각지도 않던 고민거리가 생기곤 한다. 우선 이런 저런 행사에 얼굴을 내밀어야 하는 것이 체질과 잘 맞지 않아 고민이지만, 그런 일들이 예술환경을 개선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해야 할 것이고, 더불어 그 행사에도 보탬이 된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해야 한다는 정도는 늘 명심하고 있는 바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가장 재미없고 불편한 것이 서열 문제다. 앞이면 어떻고 뒤쪽이면 뭐 어떤가? 서로 도와서 행사가 조금이라도 더 빛난다면 좋은 일 아닌가? 하지만 예술단체의 의견은 사뭇 다르다. 누구누구 다음에는 당연히 예총회장 차례인데, `누구누구`보다 뒤에 두는 것은 후진적일 뿐 아니라 이런 대접은 예술인을 무시하는 처사라며 분노한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예술하시는 분들이 뭐 그런 촌스런 생각을 하시나, 옛날 시골학교 운동회에서도 지서장이 먼저니 우체국장이 먼저니 하는 다툼은 늘 있어 왔지만 정답은 없었고, 국가행사는 행자부의 공식 의전서열을 따라야 하는 것처럼 각 행사의 성격이나 주관처의 사정에 따라 다를 수 있으며, 특히 나 같은 경우는 이 지역에서 나고 자라 60년이 되었으니 직책과 상관없이 층층시하인 자리도 있는 법이니 이해하시라. 예술인들이 좀 더 단합하고, 좀 더 멋진 모습을 보인다면 저절로 해결될 문제 아닌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내심으로는 내가 부족하여 예술인들의 위상을 지키지 못한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가 되기도 한다.
세상 고요한 산골 기운을 타고 났으며 농부가 직업이고 한학이 부업으로 안분지족하셨던 아버지 그늘에서 뼈가 자랐으니 사분의 일에 불과하다는 현실교육과 경험으로 내 성격을 바꾸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국가의 권력서열이 어떠하다는 등 세상이 시끄럽다. 굳이 예술가들까지 나서서 서열 따위를 따지지 않아도 문화예술이 존중되는 세상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