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뭐야? 뭐 하고 싶어?”
“그냥, 잘 모르겠어. 지금은 하고 싶은 게 없어. 그냥, 살면서 찾아보려고.”
중2인 딸아이와의 대화다. 나는 딸들과 자주 이런 대화를 해야 한다고 배운 사람이다. 아이가 꿈이 없다 해도 그것에 실망하지 않고 격려하는 것이 의무라고 배운 사람이다.
“그래, 살면서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뭐.”
“근데 엄마, 엄마는 꿈이 뭐야? 뭐 하고 싶어?”
“….”
“어른들한테는 꿈을 물어보는 게 아닌가?”
새로운 특강이 들어오면 강의를 수강하는 사람들의 관심거리를 찾으러 서점에 간다. 그 덕에 특강 준비를 하면서 나는 다양한 시선을 가지게 되었다. 때로는 법무연수원의 연수자가 되었다가, 구청의 자원봉사자가 되었다가, 때로는 출판사의 전문인이 되어서 시를 고르고 소설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습관의 여정에서 2010년 겨울, 어른들의 꿈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가슴 먹먹하게 하는 시 하나를 만났다. 그리고 이 시는 내 특강에서 언제나 소개되는 화두가 되었다.
답장
시바타 도요(채숙향 옮김)
바람이 귓가에 찾아와
“이제 슬슬
저세상으로
떠나 볼까요?”
간지러운 숨결로
유혹합니다.
그러면 나
고개를 저으며 말해요.
“조금만 더
여기 있을게
아직 못 다한
일이 남아 있거든”
바람은
곤란한 표정으로
후르르 돌아갑니다.
나는 이 시를 화두로 어른들의 꿈에 대한 이야기의 문을 연다. 이 시를 처음 본 수강생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문학 강연도 아닌데 시를 소개하는 강사의 엉뚱함에 당황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 나는 시의 호흡을 읽는 방법을 배웠다. 그래서 이 시의 짧은 행에서 할머니의 가쁜 호흡을 본다. 이런 시의 호흡을 전달하면서 내가 2010년 겨울에 느꼈던 먹먹함을 수강생들에게 조금이라도 전달할 수 있는 말이 있다. “이 시인의 나이는 지금 백 살이 넘어요. 백 살이 넘은 이 시인이 전하는 `아직 못 다한 일`이란 무엇일까요? 나는 여러분들이 여전히 꿈을 꾸길 바랍니다. 어른들이 더 많은 꿈을 꾸어야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강의에서 강조하는 어른들의 꿈에 대한 이야기를 중2인 딸아이가 나에게 던진 것이다. 내가 가진 어른으로서의 꿈은 무엇인가? 몇 년 전 대학 글쓰기 수업에서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선생님은 40년 후에 무엇을 하고 싶으신가요?` 적어도 30년, 40년 후의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아야 한다는 수업에서의 내 주문을 그대로 교수에게 질문으로 돌린 것이다. 그 때 이렇게 답한 기억이 있다.
“나는 그 때에도 내가 아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전달할 수 있는 상황에 있기를 꿈 꿔요. 그 꿈을 위해 나는 책을 쓰고 강의를 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지금의 나는 여전히 그 어른으로서의 꿈의 여정에 놓여 있다. 그 짧은 호흡으로 `아직 못 다한 일`에 대해 이야기 하던 시인이 더 하고자 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시인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겨우 시인의 반밖에 살지 못했는데도 현실이 버겁고 힘들 때가 많다. 세상을 다 산 듯 내 삶의 기준으로 함부로 재단하고 평가하는 일은 더 많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빠져서 때 이른 포기를 하는 때도 많다.
온 국민이 허탈감에 빠져 있는 지금 이 시점에서는 더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한다. 내가 못 다한 일은 무엇인지, 우리가 못 다한 일은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어른으로서의 꿈으로 바뀌어 내 삶의 방향을 설정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