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빈곤의 황금시대 안에서 국가는 이제 소외, 모욕, 분노, 외로움, 열등의식, 공포를 경험하는 이들에게 여지 없이 사회적 무력을 가한다. “너희들에게는 인간적인 삶이란 존재하지 않아”라며 소수의 권력을 핑계로 공동체 공간 안에서 몰아내고 있다. 이런 고립으로 인한 침묵은 인간이 상대방에게 행사하는 숱한 무력들 가운데 가장 끔찍한 것일 수 있다. 저항의 방식들이 부재했던 대중들이 이제 그 분노감을 표출하고 있다.
2016년 가을, 어쩌면 경험하지도 못할 낙관의 희망을 가지고 저마다 살아가고 있지만, 이 사회의 분위기는 여전히 메마른 사막을 연상케 한다. 이른바 `게이트`로 명명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허탈한 사건도 그렇고, 예외 없이 문학판에서 일어나는 성추행 문제, 검찰 고위직의 비리들, 한 농민 죽음도 이런 황량한 분위기에 일조를 하고 있다. 이 사회는 개인에게 가해지는 고통과 억압에 대한 `치유`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공감을 상실한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일시적인 위로와 연민은 곧 시간이 봉합해 버리는 `기억상실`로 이어지거나,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개인 이기주의는 이 시대의 문제가 모두 `우리가 가해자`라는 인식을 망각케 한다. 2014년 봄의 세월호 사건도 그렇고, 2015년 어느 가을날 세상을 등진 어느 노동자의 사연, 그리고 2016년 그 `게이트` 사건과 공권력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농민의 이야기도 우리에게 잊혀진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 국가는 이런 희생자들에게 냉정하다. 살아있는 이들의 가족들이 가지는 그 깊은 슬픔에 대해 국가는 공감과 반성 보다는 잔인한 사회현실을 들어 이들에게 슬픔의 감정을 애써 억누르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한다.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공감을 상실해 버린 이 시대의 풍경은 마치 조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를 떠올리게 한다.
갑자기 어느 도시 전체가 알 수 없는 전염병에 시달리게 되면서 시작되는 이 소설은 도시의 많은 사람들이 눈이 멀게 되는 희귀한 병에 시달리게 되고, 정부는 의사, 아이, 창녀, 노동자 등 병에 걸린 이들을 병원에 격리수용한다. 다만 의사의 아내인 한 여성이 눈이 멀쩡하게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남편을 지키기 위해 눈먼 자들처럼 행동을 해 병원에 같이 수용된다. 이 순간부터 이 아내는 눈먼 자들의 생존을 위한 끔찍한 현장을 목도하게 된다.
`만약 이 세상에서 우리 모두가 눈이 멀고 단 한 사람만이 보게 된다면`이라는 가상의 설정을 바탕으로 한 이 소설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진정한 `소유`의 문제를 이야기 하고 있으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잃었을 때에야 가지고 있는 것이 진정 무엇인가를 일깨워 주고 있다. 이 소설에 의하면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판단하는 순간 이것에 대한 서로의 공감은 극대화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생존을 위해 소유하였을 때보다 더 잔혹한 개인의 이기를 만들어 내고 타인에게 상처를 입힌다는 것이다. 하여 여 주인공은 `이 순간 가장 두려운 것은 나만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토로한다.
어쩌면 우리는 최근 벌어지는 이 사회 안의 부정적 풍경들을 모두가 눈먼 자들처럼 애써 보지 않으려고 하거나 아니면 나만 눈을 떠 보는 것처럼 하는 식의 기형적 시선을 키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한다. 눈이 멀었지만 본다는 것인가. 우리는 모두 볼 수 있지만 보지 않는 눈 먼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라는 여 주인공의 소설 말미의 발언이 의미심장해지는 2016년, 가을이 지나고 있지만 여전히 몸과 마음이 추운 시간들을 간신히 넘어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