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시대에는 조정의 중대한 사태나 가뭄, 홍수 등 천재지변이 있을 경우 임금은 교서를 내려 백성을 위로하고 민심을 달랬다. 이렇게 나라에 안 좋은 일이 있어서 내리는 교서를 그냥 교서라 하지 않고 특별히 죄기교서(罪己敎書)라고 하였다. 임금이 자신의 죄를 자책하면서 내리는 교서라는 뜻이다. 이 죄기교서를 내릴 때에는 자신의 잘못을 나열한 다음 신하들에게 직언을 구했다. 그러면 신하들은 국정의 잘잘못을 낱낱이 들추면서 그에 대한 시정책을 제시하였고 임금은 이를 여러 대신과 논의해 국정에 반영했다.
세종 8년(1426) `세종실록`에 적힌 죄기교서다. “여름에는 가뭄이 심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여 얼음이 얼지 않는 자연 재변(災變)이 거듭되어 사람들은 잿더미 속에서 살아가고 곡식은 말라 죽었다. 이러한 하늘의 견책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면서 이에 대소 신료들의 충고와 직언에 힘입어 나의 미치지 못하는 점을 메우려 한다.(중략) 무릇 과인의 잘못과 실정, 여러 신하의 충성과 아첨, 시정의 잘된 점과 잘못된 점, 법도의 좋은 점과 나쁜 점, 백성들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 각자 비밀 상소를 올려 숨김이 없이 다 진언하라. 내가 모두 친히 볼 것이요 담당관에게 맡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말이 혹 맞지 않더라도 죄 주지 않을 것이다. 중앙과 지방의 현직에 있는 신하들 및 물러나 있는 신하들은 모두 나의 지극한 뜻을 잘 인식하고서 상소를 올리라.”
즉 칭찬이든 비판이든 책임을 묻지 않고 모든 상소를 임금이 친히 읽고 국가정책에 반영한다는 뜻으로 성군의 면모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떳떳하지 못한 것이 있을 때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 부끄러움을 스스로가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대인이 되게도 하고 소인이 되게도 한다. 부끄러움을 고쳐 대인이 되는 길은 분명히 알고 있는데 이러한 길을 가기는 그리 쉽지 않다. 이것은 부끄러움에는 복합적인 사회적 정서가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속성은 사회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동화하려는 욕망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사회의 통념이나 도덕률에 일치하지 않는 상태에 있을 때 부끄러움을 느낀다. 자녀가 문제적 행위를 저질렀을 때 부모로서의 부끄러움, 스스로의 사회규범을 어긴 각종 도덕적 일탈행위 등이며 이것들이 사회동화의 욕망으로 그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는 것에 관계됐을 때는 자기혐오와 모멸을 일으키고 감출 수 있는 것일 때는 간교함으로 사실을 변명하거나 엄폐하도록 만든다.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사회의 통념이나 도덕률에서 벗어난 외톨이, 나를 대면하는 일이다. 거울에 비친 떳떳하지 못한 자신의 민낯을 보는 일이다. 그래서 그 일은 불편하고 괴롭다. 자기혐오나 사실 엄폐는 이 불편함과 괴로움을 회피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자기혐오나 모멸을 통해 사회와 동화하고자 하는 자신의 숨은 욕망을 실망시켜 포기하게 하려 해도 욕망은 잠재워지는 존재가 아니며 부끄러운 사실을 엄폐하여 사회와의 표면적인 동화를 실현하더라도 `자기기만`이라는 또 다른 부끄러움이 추가된다. 부끄러움이 이런 과정을 거치면 인간은 끔찍한 괴물로 변한다.
윤기(1741~1826)는 무명자집(無名子集)에서 부끄러움이란(恥) `잘 쓰면 군자가 되고 잘못 쓰면 소인이 된다`라고 적고 있다. 맹자는 `부끄러움은 사람에게 있어 중대한 것이다`라고 했고, 공자는 `중용`에서 `부끄러워 할 줄 아는 것은 용기에 가깝다`고 했다. 떳떳하지 못한 나를 직시하는 괴로운 일을 감내하기가 뉘라서 쉽겠냐마는 지금의 국가적 혼란을 야기한데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는 인물들은 대통령부터 말단 관료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에 대해 거울 앞에서 모습을 비춰보고 국민들 앞에 속죄해야 할 것이다. 600년 전 세종이 남긴 `죄기교서`는 짧은 임기 동안이라도 국가를 경영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교훈으로 읽힐 기록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