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청음(淸陰)과 지천(遲川), 그리고 여야 당수(黨首)

등록일 2016-09-09 02:01 게재일 2016-09-09 18면
스크랩버튼
▲ 강희룡<br /><br />서예가
▲ 강희룡 서예가

동아시아 역사에서 1636년은 명과 청이 교체되는 격동기로 조선에서는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을 겪는다. 이 전쟁은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수 십 만의 백성이 포로로 청으로 끌려가 고초를 당하는 그 피해가 유례없이 막심했다. 병자호란 당시에 마음고생을 많이 한 인물을 들자면 삼전도(三田渡)의 비문을 쓴 이경석과 청조와의 화친을 주장한 최명길(1586~1647)일 것이다. 이들은 역사의 오명을 뒤집어쓸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선택했다. 그 반대편엔 척화론을 주장한 김상헌(1570~1652)과 삼학사(三學士)로 그들은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명분과 원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걸었다.

당시 이조판서 최명길과 예조판서 김상헌의 극한적 대립의 원인은 최명길은 김상헌이 대의명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명성을 얻기 위해 척화를 주장한다고 보았고, 김상헌은 최명길을 남송 때 금(金)나라와 화친을 주장한 진회(秦檜)에 비유하며 나라를 팔아먹는 간신으로 몰아세웠다. 이렇게 대립을 보이던 두 사람은 그 후 청나라의 심양에서 벽을 사이에 두고 함께 감옥살이하는 신세가 됐는데, 김상헌은 압송되어 갔지만 최명길은 제 발로 찾아간 것이 서로 다르다. 인조의 항복으로 김상헌은 벼슬을 놓고 안동에 낙향해 있다가 청이 명을 공격하기 위해 조선에 출병을 요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1641년 1월에 심양으로 압송되었다.

이듬해인 1642년 10월에 심양에 간 최명길의 사연은 좀 다르다. 청의 압박에 못 이겨 조선은 군대를 출병하게 되었는데 당시 영의정이던 최명길은 임경업의 심복인 독보를 명에 밀사로 보내 조선이 부득이 참전하게 된 사실을 알리고 명과의 전투에서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다. 이 일이 후에 청에 발각되어 그는 모든 책임을 지고 아들 최후량에게 자신의 장례 도구를 지참케 하고 심양으로 떠났던 것이다. 청의 심문과정에서 `나는 영의정으로서 크고 작은 모든 일에 관여했고, 이번 일은 나 혼자 주도한 것이다. 그리고 임경업이 평안 병사로 있었으므로 그에게 배를 마련해 보내도록 한 것이다. 우리 임금께서도 모르는 일이고 신하들도 아는 이가 없다.`라고 말하고 모든 책임을 혼자 지고 투옥되었다. 1645년 2월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수행하고 환국할 때까지 이 두 사람은 같은 감옥에서 2년을 함께 지내게 된다. 이 감옥생활은 그동안 쌓였던 감정의 앙금을 풀고 둘 다 나라를 위해 행동한 것임을 서로 인정하는 계기가 됐다.

김상헌의 청음집(淸陰集)과 최명길의 지천집(遲川集)에는 2년 동안 이들이 주고받은 시가 100여 편 수록돼 있다. 이긍익(1736~1806)은 연려실기술에서 `심양옥에 갇힌 사람들(瀋獄諸囚)` 기록에 두 편의 시를 인용함으로써 그들이 화해했음을 묘사하고 있다. 그 내용은 “최명길은 처음에 김상헌이 명성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의심하여 정승의 천거에서 제외까지 했으나 함께한 감옥생활에서 죽음이 눈앞에 닥쳐도 애국의 마음이 확고하게 흔들리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고는 마침내 그 절의를 믿고 탄복했으며, 청음도 지천을 나라 팔아먹는 간신으로 보았으나, 목숨 걸고 자신의 뜻을 세우면서 조금도 꺾이지 않는 모습에 그의 본 마음이 오랑캐를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자 두 사람이 서로 공경하고 존중하는 사이가 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 정치적 노선의 차이로 경쟁과 대립을 한 사례는 많다. 해방 후 동서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던 우리의 정치사는 지금의 20대국회에서 여와 야당 대표가 서로 지역이 바뀌어 탄생하였다. 이젠 지역세를 탈피하고 서로의 정치노선이 다르더라도 궁극적인 목표는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책을 펼쳐달라는 게 국민들의 요구이다. 개인의 영욕이나 표를 의식한 얄팍한 포플리즘은 결국 나라를 환란 속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을 국민들은 잘 알고 있다.

아침산책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