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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맛에 물들다

등록일 2016-06-17 02:01 게재일 2016-06-17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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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주영수필가
새벽 바다의 파도 소리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지난 밤 세차게 불던 바람이 잔잔해졌다. 일출사진을 찍으러 바다를 찾았다. 캄캄한 어둠속의 기다림은 설렘이다. 설렘은 붉게 눈으로 가슴으로 스며든다.

거센 바람과 높은 파도를 이기고 돌아오는 어선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느라 분주했다. 항구에 서 있는 여자아이와 아주머니를 바라본다. 귀항하는 배를 기다리는 모습이다. 바람이 거세었던 지난밤에 모녀는 얼마나 가슴 조이며 기다렸을까. 나는 슬그머니 사진기를 가방에 넣었다. 사진 찍는 것을 포기하고 그들을 바라본다. 여자아이는 나와 시선이 마주칠 때 마다 연신 웃어주었다. 배 한척이 도착하자 여자아이는 항구 쪽으로 뛰어갔다. 사라져가는 가족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느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만선의 꿈은 항구에 닻을 내리고 저 가족이 함께 마주앉는 온기 넘치는 밥상은 얼마나 달고 감사한가.

생각이 여유롭지 못할 때 바다를 찾는다. 먼 바다에서 밤을 지새우고 돌아오는 고깃배들, 뱃고동 중저음소리에 마음이 고요해진다. 바다는 늘 나에게 넉넉함을 안겨준다. 나는 바다가 좋다. 그 중에서도 구룡포 호미곶 앞 바다를 좋아한다. 새벽 일출은 물론 오후의 일몰도 함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동해안 어디서든 일출을 볼 수는 있지만 일몰을 보기란 쉽지 않다. 호미곶은 일출과 일몰을 함께 볼 수 있는 곳이다. 해 지는 시기에 따라 독수리바위가 해를 품는 풍경도 만날 수 있다.

서쪽 하늘이 붉게 빛난다. 붉고 화려하게 물드는 바다를 오래도록 바라본다. 뜨겁던 여름 한 낮의 시간들이 형형색색으로 흩어지는 빛의 채색이다. 저 화려한 빛이 사라지면 곧 어둠이 내리겠지 생각하는 순간, 숙연해진다. 하루가 조용히 저물고 있다. 내가 스쳐 지나온 시간과 걸어갈 시간을 생각하게 하는 붉은 노을이다. 뭉게구름들 위로 노을이 번졌다 사라진다.

유년의 기억 속으로 다시 붉게 번진다. 해넘이 바다는 그리움이다. 회사에서 돌아오는 아버지를 기다릴 때였다. 아버지 등 뒤에 그려진 붉은 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풍경이다. 해가 지고 어둠이 시작되는 과정은 매순간 매혹적인 시간이다. 하늘에서 시작한 붉은색은 바다를 붉게 물들인다. 붉게 물든 바다가 점점 옅어지면 어둠이 찾아온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니 허기가 느껴진다. 바다에 오면 늘 물회가 먹고 싶어진다. 포항의 겨울 별미가 과메기라면 여름 별미는 물회다. 물회는 주재료가 싱싱한 생선이니 더위에 지쳤을 때 입맛 돋우는 음식이다. 도다리, 광어, 오징어, 전복 등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 물회 이름이 달라진다. 밥과 함께 먹지만 국수와 함께 먹으면 그 맛 또한 감칠맛난다. `생선회를 어떻게 물에 말아 먹을까` 하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생선회를 찬물에 말아먹으면 살이 쫀득쫀득해져서 식감이 살아난다. 매콤하고 담백한 맛을 알고부터 좋아하는 음식이 되었다.

어렸을 적, 아버지는 장날이면 싱싱한 횟감을 사와서 물회를 해주셨다. 한 숟가락 떠 먹여주시던 그 붉은 국물 맛은 어른이 된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매콤하면서 달콤한 그 맛. 입맛이 없을 때 새콤달콤한 물회가 먹고 싶어진다. 물회는 아버지가 요리해주신 사시사철 보양음식이었다. 이제는 아버지가 만들어 주시던 그 맛의 물회는 먹을 수 없다. 고추장 붉게 푼 얼음물에 회를 넣어 말아주시던 아버지의 그 손맛이 그리운 날이다.

새벽 어둠속에서 붉게 떠오르는 동해의 일출이 설렘이라면 태풍이 지나간 바다에 붉게 채색된 노을은 그리움이다. 잠시 멈춰 그리운 것에 붉게 물들어 보았다. 밤바다를 거닌다. 방파제에는 밤낚시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이 보인다. 바다냄새가 코끝에 시원하게 머문다. 붉은 맛에 물든 하루다. 후덥지근하고 답답한 무더운 여름도 살맛난다. 눈과 귀는 정화되고 입맛도 되찾은 하루다. 삶의 오감을 깨우는 붉은 맛에 물들고픈 날에 다시 바다를 찾을 것이다.

어둠이 내리면 등대의 불빛이 바다에 물든다. 빛의 경계에 서서 다시 생(生)에 붉게 물들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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