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평안도에는 구상 시인 등이 `응시`라는 동인지를 펴냈는데, 이중섭은 표지화를 그렸다. `응시`에 실린 작품들은 “문학예술은 정치에 복무해야 한다”란 공산당의 강령에 전혀 부합되지 않았고, 그래서 일부 동인들이 문학의 자유를 찾아 남으로 내려왔는데, 이중섭은 시인 구상과 동행했다.
그들은 1950년 6·25를 만나 피난살이를 하게 되고, 칠곡군 왜관읍 베네딕토 수도원 근처에 잠시 머물다가 전선이 남하하자 부산을 거쳐 제주도까지 가게된다.
생활수단이 없던 이중섭은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낸다. 가족과 생이별을 한 그는 외로움과 절망감과 생활고로 거식증을 동반한 정신질환을 앓게 되고, 행려병자 수용소에서 40세의 나이로 숨져간다.
빈센트 반 고흐를 세상에 알린 것은 제수가 쓴 `고흐 평전`이었고, 이중섭을 세상에 내놓은 것은 구상 시인이 쓴 `이중섭 평전`이었다. 이 평전이 없었다면 두 천재화가는 영영 묻혀버린 무명화가가 됐을 지 모른다.
세상이 이중섭에 열광하는 것은 `가족`이 주제이기 때문이다. 소수레에 가족을 싣고 자신은 소고삐를 잡은 `길떠나는 가족`, 싸우는 닭이 아니라 입맞춤하는 암탉과 수탉을 그린 `부부`, 닭 한쌍이 만나는 `환희`, `닭과 가족`, `복숭아밭에서 노는 가족`, `아버지와 장난치는 두 아들`, `물고기와 노는 세 어린이`, `시인 구상의 가족`, 일본 식구들에게 보낸 수많은 그림편지들, 이중섭은 `가족의 소중함`을 피 토하듯 외치다가 한 줌의 재가 됐다.
/서동훈(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