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조 교수의 `붓다의 치명적 농담`(문학동네·2011)을 읽습니다. 이름 하여, 금강경 별기(別記)입니다. 별기(別記)란 본문에 덧붙여 따로 적거나 그런 기록을 뜻합니다. 작가가 별기의 방식으로 금강경을 해설한 것은 듣는 자의 성격과 자질, 문화와 교양, 시대와 상황 등을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대상으로 보면 금강경이 설해지던 당시의 독자는 일반인이 아니었습니다. 진리를 찾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각오로 오랫동안 수련했던 고도의 불교수행자들이었지요. 그런 의미에서 금강경은 매우 고차원적인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상황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금강경의 `말씀`은 불교의 오랜 역사를 통해 누적된 어법과 문제를 공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현대인들이 도저히 그 맥락과 상황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언어적으로는 금강경의 의미와 교훈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주고받는 언어로 소통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작가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부분입니다.
작가는 최상승의 경지보다 그것이 타파하고자 하는 장애의 현실에 대해 논의했고, 금강경이 말하는 언어보다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과 맥락을 보여주고자 했으며 무엇보다 이 모든 이야기를, 현재 우리가 쓰는 일상적 언어의 지평 위에서 전달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경전의 언어를 축자적으로 따라가는 소(疏)의 방식보다 과감한 해석과 체계를 제시하는 별기의 방식이 오늘날에 더 유효하다고 본 작가의 판단과 성과는 충분히 수긍할 만합니다.
설화적이고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법화경`이나 `화엄경`을, 일상적이고 교훈적인 것을 선호하는 사람은 `법구경`이나 `수타니파타`를, 핵심만 추려 불교의 체계와 골격을 알고 싶으면 `대승기신론`이 제격이라며 작가는 독자의 성향과 근기에 맞는 방편을 찾는 것이 좋다고 추천합니다.
만공 스님(1871~1946)의 일화 중에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때는 한말에서 일제 초기, 몰락한 궁중의 상궁 나인들이 스님을 찾아와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법문은 않고 뜬금없이, 노래 한 자락을 읊었다고 합니다. “저 산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잘 뚫는데…. 우리 집 멍텅구리는 뚫린 구멍도 못 뚫는구나.”
자리에 앉아 있던 여인들이 구석구석에서 킥킥거리고 쑥덕거렸답니다. 만공 스님은 간절한 마음으로 진리의 조갯살을 열어보였는데, 여인네들은 안타깝게도 그것을 늙은 스님의 음담패설로 들었던 것입니다. 생나무를 힘겹게 뚫을 필요가 없습니다. 뚫린 구멍을 찾으면 됩니다. 내 안에 뚫린 구멍. 이게 무얼 의미할까요?
불교는 `불성`(목표)과 `번뇌와 무지`(문제), `반야`(방법)라는 삼각 구도를 갖고 있습니다. 이 관계를 육조 혜능이 비유로 설명해놓은 것을 한영조 교수는 현대적으로 다듬어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산 속에 금이 묻혀 있다. 산은 금을 몰라보고, 금도 자신을 둘러싼 것이 산인 줄 모른다. 의식이나 자각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생각할 줄 알아 이 보물이 귀한 줄 안다. 전문가를 시켜 산을 뚫고 원광을 캔다. 그것을 불에 녹여 찌끼를 떨어내고 순금을 얻는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은 큰 부자가 되어 오랜 가난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귀한 불성이 우리 몸 안에 숨은 것도 이와 같다. 덧없는 몸이 세계라면, 나와 남을 분별하는 습관은 산이고,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번뇌는 금을 덮은 광석찌끼다. 불성은 금이고, 그것을 되찾는 전문 반야지혜는 전문제련사이며, 정진용맹은 그 광석찌끼를 뚫고 깨는 일이다. 지혜의 제련사를 시켜 나와 남을 분별하는 뿌리 깊은 습관이라는 산을 뚫고, 거기서 번뇌 광석을 확인하고 이를 깨달음의 불로 제련하면, 거기 금강처럼 빛나고 영원한 불성(金剛佛性)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 경의 이름에 금강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