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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비둘기`를 생각하며

등록일 2015-11-06 02:01 게재일 2015-11-06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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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봉준<br /><br />숭실대 교수·베어드학부대학
▲ 차봉준 숭실대 교수·베어드학부대학

몇 해 전부터 가끔씩 가슴이 답답해질 때마다 성북동 주변을 서성인다. 서울의 도심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묘하게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흔히 성북동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 중 하나가 이 나라의 엄청난 재력가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이미지다. 결코 속내를 드러내지 않겠다는 의도로 느껴지는 높은 담에 둘러싸인 저택들이 즐비하다. 한 눈에 보기에도 엄청난 규모일 뿐 아니라 잘 가꾸어진 정원 조경까지 더해져 보는 이의 부러움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곳을 거니는 사람들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깨끗이 포장된 도로 위에 간간이 보이는 방범초소만이 덩그러니 골목을 지키고 있고, 나처럼 한국 최고의 부촌(富村)을 탐방(?)하러 온 낯선 이방인만이 그 길을 걷고 있다. 현실이면서도 누군가에게는 비현실의 공간이다.

한편 성북동을 점령하듯 자리 잡은 그곳의 어딘가에 멈춰 서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면 서울 도심의 번화함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다. 제각각 높이를 달리하는 수많은 빌딩의 각축,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차량들의 행렬이 시야에 담을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해방 70년의 짧은 역사 속에 일궈낸 장면들이 마치 내 것인 양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엄연한 현실임에도 어떤 의미에서는 비현실적인 광경이다.

그런데 시선을 돌려 성북동의 또 다른 한 자락을 훑어 내려오면 과거 속의 한 장면 같은 비현실적 풍경이 현실로 다가온다. 사실 성북동의 진면목은 여기에 있다. `북정마을`로 불리는 이곳에서는 비현실적인 현실이 따뜻하게 다가온다. “아니! 아직도 서울 한복판에 이런 곳이 남아 있었어?”라는 놀라움과 감탄이 연이어 터져 나온다. 우리들의 1960·70년대가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얕은 담벼락을 맞대고 둘레둘레 이어진 지붕 낮은 집들이 눈물나게 정겹다. 그 집들을 잇고 있는 굽이굽이 골목길은 당장이라도 뛰어다니며 술래잡기놀이를 하고 싶은 동심을 솟구치게 만든다. 거대한 저택을 바라보던 부러움이 아닌 소담한 것에 대한 그리움이고, 지극히 현실적인 공간에 대한 친근감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거와 현재의 공존이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을까. 어디나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과거를 더 이상 용납하지 못한다. 이미 이곳의 골목 곳곳에도 재개발을 알리고 독려하는 글귀들이 나붙어 있다.`머지않아 이곳도 변하겠구나!`는 생각에 씁쓸함이 밀려온다. 이 공간의 주인이 아니면서도 옛 향수에 젖어 개발을 반대하는 건 오히려 이기적이다. 그렇지만 쉽게 동의하지 못하고, 흔쾌히 박수치지 못하는 마음 한 편에는 변화, 성장, 발전, 풍요, 이런 따위의 현실들이 결코 행복하지만은 않았다는 짧은 경험 탓이다.

성북동을 거닐다보면 문득 떠오르는 한 편의 시가 있다. 다들 짐작하고 있겠지만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다. 시인은 1960·70년대를 관통해 거세게 불어 닥친 산업화와 도시화의 열풍 속에서 보금자리를 잃어버린 연약한 비둘기의 애처로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자유롭게 거닐던 널찍한 마당도 잃어버리고, 마음껏 둥지를 틀던 숲도 잃어버린 비둘기는 이제 도심의 빌딩, 고가 밑, 옥상 등을 배회하며 도시의 천덕꾸러기가 되어 있다. 그런데 이제 또 다시 개발이란다. 비단 성북동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나마 우리 곁에 과거의 풍경처럼 남아 있는 이 조그마한 공간마저 자취를 감춘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과연 거대한 성채의 주인이 되어 호사를 누리며 다들 잘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이렇게 호젓하게 옛 향수에 젖어 쓸데없는 상념에 빠진 채 골목골목을 거닐 수 있는 호사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으니…. 그래, 즐길 수 있을 때 맘껏 걸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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