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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가 현송 정치환 화백의 회상

등록일 2015-09-15 02:01 게재일 2015-09-15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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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곤<br /><br />대백프라자갤러리 큐레이터
▲ 김태곤 대백프라자갤러리 큐레이터

지난 주 한국 미술계의 거목이셨던 현송(玄松) 정치환(鄭致煥) 화백이 팔공산 작업실에 홀로 남겨둔 벼루에 물감이 채 마르지도 않은 채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가셨다. 늘 인자한 성품과 조용조용한 언행으로 지역 미술계 좌장역할을 해오셨고, 제자와 후배들에게 스승으로서 늘 귀감이 되셨기에 그의 타계는 무엇보다 지역 미술계에 큰 아픔이 아닐 수 없다. 지난여름 유난히 무더웠던 폭염과 힘든 메르스 사태 속에서도 이승과 질긴 인연의 끈을 놓지 않으셨던 선생님이셨건만 가을의 문턱인 처서를 넘기면서 자연의 순리를 따르시듯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시고 말았다.

필자는 현송 선생님과의 인연이 20여년은 훨씬 넘어가는 듯하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큐레이터 업무를 갓 시작할 때였다. 한국 미술계 계보가 무엇인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일을 할 때였다. 서툴고 두서없는 기획행사는 늘 이빨 빠진 사발처럼 꼭 뭔가 하나는 빠뜨리고 진행해 곤욕을 치르기 일쑤였다. 그때면 항상 좌충우돌 어설픈 결과를 낳기 일쑤였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시다가 가끔 갤러리를 들르실 때면 미처 알지 못했던 미술계 상황과 기획자가 가져야할 자세들에 대해 상세히 일러주시곤 하셨다. 그리고 현송 선생님은 당신께서 전공하신 한국화에 대한 책무라고 할 수 있는 우리전통 한국화의 정체성에 대한 회복과 재정립에 대한 관심과 후원을 이어오셨다. 광복 이후 한국전쟁을 겪으며 한국화를 전통적으로 배우고 익힌 1세대 화가가 가지는 고뇌라고 단정 지어도 될는지 모르겠다. 우리의 전통미의식이 깊이 배어있고, 묵향이 가득한 작품을 늘 가까이 두고 계셨지만, 우리의 미의식이 가지는 정체성과 후학들이 한국화가로서 겸비해야 할 자세와 작가관에 관한 깊은 성찰은 늘 그를 힘들게 했던 족쇄였는지도 모른다.

1970년대 초 전통 한국화의 뿌리가 없었던 대구에 정착해 지역을 중심으로 한 영남 한국화단에 새로운 전통을 심었다. 1970년대 대학을 갓 졸업하고 내려온 대구에서 현송이 정착할 수 있었던 당시 대형건물을 신축하고 새롭게 개점한 대구백화점이 있어 가능했다. 백화점 초대 디자인실장직을 맡아 다양한 사인물과 광고물을 손수 제작하고 그리며 유통업에 몸을 담으면서 대구와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나갔다. 그의 이런 노력 덕분에 백화점은 빠른 성장을 이어갈 수 있었고, 현송은 교육자의 길을 계속해 이어갈 수 있었다. 전통회화 특유의 묵법을 능숙하고 다양하게 구사해 한국화의 정통성과 현대성을 동시에 살리고 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1975년 첫 개인전을 가졌던 곳도 역시 현송이 몸담았던 대구백화점 화랑이었다. 이처럼 그는 지역 미술계와 교육계에 크고 많은 족적을 남겼다. 서양화단에 비해 늘 부족한 작가수와 적은 화랑기획행사에도 불구하고 후배와 제자들이 한국화가로 지속적인 성장을 해 나갈 수 있게 세심한 배려를 기울이셨기에 지금의 대구 한국화단이 굳건하게 제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된 셈이다.

묵법의 변주로 전통 수묵의 교향악을 연주하듯 능수능란한 붓놀림은 제28회 국전 문화공보부 장관상과 제1회 의제 허백련 예술상(창작상) 수상 등으로 이어졌고, 계명대 미술학과 조교수, 영남대 조형대학 학장 겸 조형 대학원 원장, 국전 추천작가, 동아미술제 심사위원 등으로 작가 경력을 쌓아 올라갈 수 있는 배경이 된 셈이다. 눈부실 정도로 화려한 초록빛의 팔공산을 화폭에 남기시고 홀연히 무릉도원으로 떠나신 현송 선생님이 오늘 따라 유독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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