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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숭아

등록일 2015-08-21 02:01 게재일 2015-08-21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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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숭아는 봉선화과 한해살이풀로 꽃말은 `소녀의 순정`이다.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김형준 작시·홍난파 작곡 `봉선화`)

“비 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김상옥 시 `봉선화`)

봉숭아는 봉선화과 한해살이풀로 봉선화(鳳仙花)라고도 한다. 봉숭아 냄새 때문에 뱀이 가까이 오지 않는다 해서 금사화(禁蛇花)라 부르기도 한다. 봉숭아는 한약재로 쓰이고 시와 노래로 사랑 받기도 하지만 홍난파의 `봉선화` 노래 속에는 우리 민족의 애환과 광복의 염원이 담겨 있어 일제에 의해 금지되기도 했다.

경기도 시흥시 매화동에서는 `봉숭아 꽃 축제`를 열고 손톱에 꽃물들이기 행사를 한다. 빨간 꽃잎에 소금과 백반을 넣고 이겨서 손톱 위에 얹고 잎으로 싸서 실로 꽁꽁 동여맨다. 하룻밤 자고 난 후 풀면 손톱에 고운 빛깔의 물이 든다. 여름에 들인 꽃물이 첫 눈 올 때까지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려 충선왕은 몽골의 미움을 받아 임금이 된 지 5년 만에 왕위를 내놓고 몽골로 붙잡혀 갔다. 그곳에서 손가락을 흰 헝겊으로 동여맨 소녀를 만났다. 소녀는 고려에서 온 공녀인데 고향이 그리워 고려의 풍습대로 봉숭아의 꽃물을 들이고 있다고 했다. 소녀는 왕께 오랫동안 준비한 노래를 들려주었다. 왕께서 반드시 성공하여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기도를 담은 가야금 가락이었다. 왕은 큰 감명을 받고 고국으로 돌아갈 뜻을 품었다. 무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아 고려로 돌아왔다. 충선왕은 그 갸륵한 소녀를 데려오려 했으나 이미 죽은 후였다. 왕은 소녀를 기리는 뜻에서 궁궐 뜰 앞에 봉숭아를 심게 했다. 그리고 궁녀들에게는 봉숭아 물을 손톱에 들이도록 권장했다.

김한성 <수필가·한문 지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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