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구들이 휘젓고 간 자리를 치우느라 손길이 분주하다. 식탁 위는 더 가관이다. 기름기 묻은 접시를 뜨거운 물로 씻어 내린다.
사람이 지나간 자리가 이렇게 지저분할 수가 없다. 꽉 찬 음식물 쓰레기통을 내다 버린다. 제때 버리지 않아 독한 냄새를 풍긴다. 진공청소기로 방을 밀고 다닌다.
매일 반복되는 집안일이 끝이 없다. 어쩌다 손을 놓으면 집은 엉망이 되어버린다. 가끔 나는 누구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서두른다.
약속이 있으면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이십 년 전에 취득한 운전면허증은 서랍 속에 잠자고 있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당신은 무사고, 무벌점이라며 녹색 면허증이 훈장처럼 주어졌다.
면허증을 취득하고 한 번도 운전대를 잡아 본 적이 없다. 남편의 반대에 부딪혀 포기하고 말았다. 안전에 민감한 그는 내가 운전만은 하지 않았으면 했다. 급한 것도 아니고 해서 그의 말을 따랐다.
버스를 이용하면 다른 삶을 엿볼 수 있다.
느리게 가는 대신 주변이 보인다. 무거운 짐을 든 사람을 보면 삶의 무게를 느낀다. 버스 손잡이를 꼭 붙잡고 있는 어르신을 보면 머지않은 나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다. 빌딩이 즐비한 도심의 길 위에서 밤을 보내는 이들도 있다.
얼굴 생김새가 다르듯 살아가는 모습 또한 다양하다. 버스를 타고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 속에는 삶의 향기가 있고 인생이 있다.
포도를 팔고 있는 아주머니가 보인다.
일행이 늦은 시간에 포도가 팔리겠느냐며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얼마 남지 않은 포도를 팔기 위해 오가는 사람에게 맛보라며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다.
열심히 사는 그녀를 보며 나를 본다. 살면서 한 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해 본 적이 언제였나 싶다. 주체적인 삶을 살아보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린다.
조연이 아닌 주연으로서 당당히 살고 싶다. 누구의 아내, 엄마 대신 내 이름으로 살고 싶은 것이다. 언제부턴가 심장 소리는 들리는데 가슴이 뛰지 않는다.
큰 소용돌이 없이 살아온 것 같다.
내 삶을 음식 맛에 비유한다면 심심하기 그지없다. 자리에 누워도 쉬이 잠들지 못한다. 일이 생겨도 부딪히는 것이 싫어 내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위장된 평화도 진짜 평화처럼 느껴졌다.
어디를 가도 내 존재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톡톡 튀는 성향을 부러워하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어우렁더우렁 사는 것이 모나지 않게 사는 거라 여겼다. 가족들 뒷바라지에 나를 잊은 지 오래된 것 같다.
요즘은 반란이라도 하듯 나의 색깔을 한 번쯤은 드러내고 싶다. 미지근한 삶은 안정되어 보일지 모르나 박제된 표본처럼 생기가 없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을 통해 배운다. 변화가 두려워 애써 외면하며 살아왔는지 모른다. 나 자신한테 좀 더 솔직하지 못했다. 안정된 삶이 행복이라 여기며 지금까지 살아온 것 같다.
삶의 주인은 바로 나 자신이다.
이제 내 삶의 운전대를 누구에게도 맡기고 싶지 않다. 내가 원하는 대로 감정이 흐르는 대로 맡겨 두고 싶다.
자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누구의 그늘이 아닌, 스스로 그늘을 만들어 갈 것을 다짐하며 오늘 첫 시동을 켠다.
`부르릉~부르릉~ ` 경쾌한 시동 음이 구름 속으로 울려 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