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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 톡스를 아시나요?

박순이 수필가·구미수필 회장
등록일 2015-04-17 02:01 게재일 2015-04-17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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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순이 수필가·구미수필 회장

이번 주말에는 강원도 집에 가기로 했다. 여름내 한껏 자라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막막한 풀을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매년 풀 베는 일에 시달려 지쳐있던 남편은 올해는 그냥 제초제로 쉽게 해결하자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번이 기회란 생각에 흙이 살아야 인간도 산다며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라고 말한 뒤, 그동안 남편이 위험하다고 반대해왔던 귀엽고 빨간 전동제초기를 서둘러 구입했다.

날이 선 옥수수 잎에 얼굴을 베이지 않으려고 먼저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쓰고 그 위로 초록 양파 망을 뒤집어썼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빨간 고무장화와 빨간 고무장갑, 남방 칼라 깃을 자존심처럼 치켜세우는 것으로 패션을 완성시켰다.

그런 다음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빨간 전동제초기를 손에 들고 보무도 당당하게 남편이 수확을 끝내고 지나간 뒤를 따라가며 옥수수 대와 잡초를 베어내기 시작했다. 위험하다며 처음부터 제초기 사는 것을 여러 차례 반대했던 남편은 어지간히 말 안 듣는 고집 센 마누라의 일하는 모습을 못마땅한 듯 힐끗 한번 돌아보기만 할 뿐 별말이 없었다.

나는 제초기를 어깨에 메고 나도 이렇게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라는 듯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힘껏 휘둘러댔다. 왱왱 소리를 지르며 돌아가는 제초기의 무지막지한 횡포에 꼿꼿하게 서 있던 옥수숫대와 잡초가 힘없이 쓰러졌고 파편은 허공에 마구잡이로 흩어졌다. 재미있다. 그동안 나를 묶어놨던 끈을 끊어 내는 듯 홀가분하고 짜릿한 것이 아주 상쾌했다. 누가 시키면 이렇게 할까?

평소 어지간히 더워도 땀을 흘리지 않던 나에게도 얼굴을 타고 목으로 흘러내리는 서늘한 땀줄기가 느껴진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 앞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정말 재미있는 장난감에 신바람 발동이 걸린 나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때였다. 흩어지는 파편 속에서 모자 밑 초록 양파 망과 내 얼굴 사이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난 것 같았다.

땀이 범벅이 된 얼굴과 귓불이 갑자기 불같이 달아오르며 따갑고 아프기 시작했다. 통증이 너무 심해 서둘러 집안으로 뛰어 들어온 나는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거울을 보니 눈 밑과 입술 주위가 치과에서 마취주사를 맞은 것처럼 마비가 되며 붓기 시작했다. 벌에게 얼굴 여러 군데를 물린 것 같았다. 급한 마음에 밖을 향해 소리 질렀다.

“나 돔 바요 나 돔 바~~빤니 와 바요~.”

입이 열리지 않아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서둘러 따라 들어온 남편의 눈이 황소의 그것만큼 커졌다. 그사이 나의 왼쪽 눈은 런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탄 레슬링선수 눈처럼 퉁퉁 부어올랐다. 뜨는 것조차 힘들었다.

약사 앞에서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었다. 대놓고 웃지 못해 그런지 얼굴이 시뻘게진 약사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는 듯 약간은 무뚝뚝한 얼굴로 약을 제조해 주었다. 20분이 지났으니 괜찮을 거라는 약사님 말에 안심이 된 나는 남편의 의심에 찬 눈을 뒤로하곤, 씩씩한 척 앞장서 소머리국밥집으로 들어가 저녁을 해결했다.

다행히 무사히 하룻밤을 넘겼다. 다음날 아침 거울을 보니 전체적으로 고르게 부어 펑퍼짐해진 내 얼굴은 15라운드를 뛴 권투선수보다 더 험상궂어져 있었다. 진심으로 걱정이 되는지 고소해서 그런지 괜찮아? 하며 나를 보고 웃는 남편을 보며 나도 따라 웃었다. 우린 서로를 쳐다보며 자꾸자꾸 웃었다.

두문불출 며칠 만에 다시 사람들을 만나니 얼굴이 훤하니 좋아졌다고 이구동성 난리다. 나는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듯 자랑스럽게 사건의 전말을 실감나고 재미있게 이야기 해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예뻐진 건 아마도 봉 톡스를 맞아 주름이 펴진 까닭일 거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나저나 나는 정말 운이 좋은 것 같다. 얼굴 여섯 군데 허리 한 군데 총 일곱 군데를 벌에 쏘이고도 당분간 얼굴이 좀 남세스러워 그렇지 이렇게 무사히 살아있지 않은가. 그것도 무료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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