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서는데 진눈개비가 날린다. 설마 쌓이는 눈으로 변하랴 싶었다. 오늘따라 주차 공간이 없다. 상가 동네를 두 바퀴나 돌아도 마땅찮다. 슬슬 짜증이 돋는다. 다른 골목으로 접어드니 다행히 저 안쪽에 빈 공간이 보인다. 얼른 주차를 한 뒤 우사인 볼트처럼 달린다. 여전히 진눈깨비는 날린다. 이십 분이나 늦었다. 그래도 괜찮다. 다른 친구들 사정도 비슷했으니.
점심을 먹으며 창밖을 보니 함박눈이 내린다, 교통 흐름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만 내린다면 괜찮겠다고 생각한다. 그때 아들에게서 문자가 온다. 눈이 많이 내리니 조심해서 오란다. 영화관까지 가는데 몇 발자국이라고.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상영 시간에 딱 맞춰 자리에서 일어난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차 지붕마다 함박눈이 쌓였다. 그런데 웬 걸, 내 차 뒤에 누군가 호기롭게도 대각선 주차를 떡하니 해놓았다. 앞 유리에 쌓인 눈을 걷어내고 연락처를 찾으니 전화번호 쪽지가 아래로 쏙 빠져 있다. 번호를 도저히 읽을 수가 없다. 영화를 포기할 수 없어 택시라도 잡기로 한다. 눈 오는 날 택시 잡기는 공중을 지나는 제트 비행기를 세우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 포기하고 다시 내 차로 돌아온다. 몰골은 이미 옷 입고 사우나 한 꼴이다.
영화도 못 보고 집에도 못 가고 약이 오를 대로 올랐다. 그제야 경찰의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112를 누른다. 친절한 대한민국 경찰이라니! 차 번호를 댔더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란다. 얼마 뒤 차주인이 나타났다. 내 편견대로 여성 운전자다. 민망해하는 표정에다 대고 버럭 소리를 질러 본다. 조금 분이 풀린다. 그 와중에 김여사인지 박여사인지 왈, 어떻게 경찰이 내 전화번호를 알았지, 한다. 나는 대답대신 속으로 대한민국 경찰은 전지전능하거든요, 라고 대꾸한다.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