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포도`, `광야` 등 일제강점기 저항 시인 육사 이원록(1904~1944) 선생은 퇴계 이황의 14세손이다. 퇴계가 후학을 양성했던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도산서원에서 불과 6km 떨어진 원천리는 육사의 고향마을이다. 그의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4년 안동시는 이곳에 이육사문학관을 건립했다.
문학관은 부지 7천603㎡에 건평 581㎡, 지상 2층 규모로 지어졌다. 주변에 이육사 동상을 세웠고, 형제들과 생활한 육우당, 청포도밭, 연못도 조성됐다.
문학관에 들어서면 흉상과 대표 시(時) `광야` 조각과 독립운동 연보 등 일대기 그래픽, 육필원고, 시집, 조선혁명군사학교 훈련모습, 베이징 감옥생활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헤드폰을 착용하고 버튼을 누르면 황혼, 청포도, 절정, 광야 등의 시를 눈과 귀로 접할 수 있는 첨단장치로 육사의 흔적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이곳에서 육사의 무남독녀 이옥비(74) 여사가 역사의 생생한 이야기를 직접 전하고 있다.
육사 고향 안동 원천리 문학관 세워져 애국정신 추모4살때 여읜 아버지… 포승줄 묶여 끌려가신게 마지막
일본인 용서 어려워… 생가복원·후원회 만드는게 꿈
□ 아버지를 죽인 일본 건너가
현재의 이옥비 여사가 있기까지는 이육사문학관 건립의 뜻을 품은 김휘동 전 안동시장의 끈질긴 권유와 설득 덕분이다.
지금도 이 여사는 이육사문학관을 통해 상·하반기 문학축전을 비롯해, 백일장, 문학기행 등 다양한 문학관련 사업을 활발하게 펼치면서 아버지의 숭고한 뜻을 전하고 있다.
이 여사가 아버지를 잃은 시기는 겨우 4살 때였다. 우여곡절의 시기를 지나 대구여고, 대구여사대 등을 졸업하고 1964년 결혼해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궁중요리 꽃꽂이 등을 공부해 제자를 양성하다가 1999년 나이 예순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해 남편과 사별한 그녀는 일본 한국총영사관에 근무하면서 일본을 조금씩 배워갔다. 이것이 첫 번째 일본행 이유였다.
먼저 그녀는 왜 그토록 아버지를 힘들게 하고 죽게 만들었는지 알아야 했다.
이 여사는 일본을 이렇게 평가했다. “개인적인 일본인은 아주 착실하고 진실하지만 여러 명만 모이면 악독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잦은 지진 등 불안감이 들어서인지 땅에 대한 애착이 우리가 느끼는 것과는 첨예한 차이가 있어 침략과 같은 생각을 자주하게 된 것은 아닐까요”
또 “초상이 나도 형제자매 구분 없이 꼭 필요한 사람에게만 알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개인주의가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이 여사는 이런 일본 생활이 아주 힘들고 외로웠지만 2~3년이 지나면서 익숙해졌다. 가슴에 큰 아픔을 지니고 있어서인지 일본인이 가깝게 다가오면 나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보게 됐다. 그렇게 일본을 알게 됐지만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신앙적으론 용서하나 이성은 도저히 용서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소회했다.
□ 아버지에 대한 기억 그래도 선명
겨우 4살 때 영결했는데도 딸에겐 아버지 육사 기억이 선명한 듯했다.
“아버지는 아이보리색 양복을 즐겨 입는 멋쟁이였습니다. 어린 저를 특별히 귀여워하셔서 핑크색 모자, 자주빛 원피스, 주름 넣은 반바지, 구두 등을 사다주곤 하셨지요. 그러던 어느 날 밀짚으로 얼굴이 가려진 채 포승줄에 묶여 어디론가 끌려가신게 마지막이었습니다”
이 여사는 다른 사람을 통해 전해들은 아버지 모습도 전했다. 아버지의 성품이 늘 강직했다는 어머니의 전언도 그 중 하나였다. 원기, 원일, 원조 등 육사의 6형제가 모여 시를 발표하고 논평하는 시회(詩會) 날이면 장원을 가려 서로를 격려하는 등 우애가 깊었다는 얘기도 전해졌다.
학창시절이던 1960년 시인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신석초 시인도 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해줬었다. “너희 아버지는 장안 최고의 신사였던데다 자존심마저 대쪽 같았다. 변장술에 능하고 말을 타고 총을 쏘는 실력은 가히 명사수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 이옥비 여사의 남은 꿈
이육사문학관이 조성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이곳을 찾은 일본인이 겨우 10명뿐이다.
이옥비 여사는 “문학적으로 방문한 일부 일본인은 먼저 사과부터 하지만 모른척하기도 한다. 문학관 영상 내용이 일본인 입장에서 자존심 상할 수 있다보니….”라고 말끝을 흐렸다.
그러면서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 “문학관에는 일본인들이 찾지 않지만 인근 도산서원에는 많이들 찾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동경에 있을 때 퇴계 15세손이라고 하니까 한 일본인이 존경을 표하고 방문한 적이 있지만 난 너희를 존경할 수 없다고 마음속으로 맹세했지요”
이 여사는 앞으로 해야 할 두 가지 소원이 있다.
하나는 1976년 안동댐 축조로 수몰 당시 형태도 맞지 않게 이건된 안동시 태화동의 육사 생가를 도산면 원천리로 제자리에 옮기는 일이다.
이 여사는 3대문화권사업의 일환으로 시행되는 이육사문학마을조성사업을 통해 생가를 예전모습그대로 복원할 계획이다.
두 번째로 서울에 육사후원회를 만드는 일이다. 안동만이 아니라 전국, 세계의 육사가 되기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담당하려면 반드시 후원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제가 태어난 곳이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입니다. 그 말은 곧 아버지가 그곳에 살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종로구에서 지번이 살아있다고 전해왔습니다. 그곳에 육사로를 만들고 육사후원회도 만들어 안동의 문학관과 같은 역할로 아버지의 문학세계를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비록 소원이지만 아버지의 작품세계와 애국애족정신을 널리 알리고 싶어 하는 딸의 절실한 마음이 고스란히 베여 있었다.
안동/권기웅기자 presskw@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