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현의 역사인물탐구⑹ <BR>김창숙
“강제로 남의 땅을 차지하는 일이 행해져서 크고 작은 차이가 뚜렷해진 뒤로, 마침내 남의 생명을 해쳐가며 위세를 부리고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제 것으로 만드는 일까지 벌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아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그처럼 많은가요? 차라리 함께 죽을지언정 맹세코 일본의 `노예`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2천만 생명만이 홀로 전 세계의 조화로운 질서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대표 여러분들은 대책과 방법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유학자에서 독립투사로 평생동안 구국 열정 불태워
파리강화회의 日규탄 독립청원서 주도·성균관대 설립
이승만·박정희와도 대립… 두 아들 모두 항일운동 숨져
애걸복걸, 아니 피를 토하면서 살려달라는 표현이 적절한 것 같은 이 문안은 지금부터 95년 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고 있던 파리평화회의(1919~1920)에 일본 침략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는 대한제국 `유림대표 137인`이 독립청원서 형식으로 작성한 파리장서(巴里長書) 내용 중 일부다.
1910년 8월29일. 이 날은 한국 최대의 흑역사, 일제강점기의 시작인 경술국치(庚戌國恥)로 기억하고 있다.
1910년은 일본이 한반도를 무력으로 침공하여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해다. 당시 일본은 송병준, 이완용, 이용구 등 친일파 5인을 앞세워 `조선인이 원함에 따라 조선과 일본이 합병한다`는 논리로 그 해 8월29일 한·일합병조약을 성립시켜 우리의 주권을 상실케 했다.
이런 격동기 속에서 우리 선열들은 나라를 찾기 위해 혼신을 불태우고 있었다. 이 중 한 사람이 심산(心山) 김창숙(昌淑) 선생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유교를 배우면서 성리학자의 길을 택했지만 풍전등화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책을 던져버렸다. 파리장서에서도 언급했듯이 일제 만행의 피해자였던 그는 일경(日警)의 고문으로 두 다리가 마비되는 등 `벽옹`(앉은뱅이 노인)이라는 별호까지 붙었다.
심산은 1879년 경북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에서 부친 호림(頀林)과 모친 인동장씨(仁同 張氏) 사이에 둘째로 태어났다. 위로는 누나다. 어려서부터 당대 이름을 날리던 이종기 곽종석 등으로부터 유학을 배웠고, 한주(寒洲) 이진상으로부터 시작되는 주리설(主理設)도 전수 받았다. 이런 성장과정에서 그도 자연스럽게 성리학자의 길로 나섰다.
그러나 그가 27세가 되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항일(抗日) 투사로 변신한다.
스승 이승희와 함께 을사5적 참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시작으로 옥고를 치르면서 출소 후 항일구국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한다. 나라의 빚을 갚고 자립경제를 함으로써 일본을 물리치자는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시작되자 그는 이 일에 앞장서서 활동하면서 대한협회(大韓協會) 성주지부(星州支部)를 결성했다.
특히 그는 유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향리에 사립학교인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세워 민족주의교육을 하였다.
친일 단체인 일진회(一進會)가 한일합병론(韓日合倂論)을 제기하자 심산은 고향인 성주에서 유림을 모아 이들의 매국행위를 규탄하는 건의서를 연서(連署)로 작성해 중추원(中樞院)에 제출하고 각 신문에 발표했다. 이 일로 그는 일경에 다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마침내 1910년 한·일 합방이 되자 나라를 잃었다는 생각으로 그는 성리학에 몰두한다. 그의 학문적 실력은 이때 닦아졌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발발하기 직전인 2월 상경하여 민족대표에 유림계(儒林界)가 빠진 것을 안 그는 영남·호남 유림 중진을 설득하고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인 장서(長書) 작성을 주도했다.
이 장서는 국내의 각도 향교 등에도 배포되었으며 원본은 심산이 그 해 3월 말 휴대하고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 문서는 중국에서 파리로 우송됐다.
이 결과 제1차 유림단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침체되었던 유림계는 한말구국을 위한 척사운동과 의병운동의 전통을 계승하여 독립운동을 개시한다.
그의 항일운동은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거세진다. 상해에서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신규식(申圭植)·김구(九) 등과 함께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조직하였다. 이에 1919년 4월25일 임시의정원 제3차회의의 결의에서 도지역별 의원을 선출하는 위원회를 개최, 4월30일부터 열린 제4차회의에서 심산은 김정묵 등과 함께 의정원 `경상도의원`으로 선출되었다. 5차회의에서 그는 교통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부의장직에도 당선되어 구국활동을 위해 혼신을 다하였다.
심산은 그의 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중화국민당(中華國民黨)의 손문(孫文)을 비롯하여 오산(吳山)·서겸(徐謙)·장병린(章炳麟) 등과 교통하여 한·중 공동 항일 운동을 추진한다.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한국독립후원회(韓國獨立後援會)의 조직이 바로 그것이다.
1920년에는 상해에서 임복성과 함께 한국독립운동을 위한 사민일보(四民日報)를 창간하였으며, 천진(天津)에서는 신채호(申采浩)와 함께 독립운동 기관지 천고(天鼓)를 간행했다.
1923년 1월 민족의 단합을 위하고 임시정부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국민대표자대회(國民代表者大會)가 개최되었다.
현재 국내 정치구조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병폐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참석자들이 창조파(創造派)와 개조파(改造派)로 양분되었고 이때 심산은 창조파의 국민의회대의원으로 추대되었으나 참가하지 않았다. 구국항쟁의 일념에 있던 그는 이때 민족운동의 분열을 우려하여 참가치 않았다.
현재까지 국민이 잘 몰랐던 사실이 발견된다. 1925년 이승만(李承晩) 임시대통령의 위임통치(委任統治) 주장이 문제되자 그는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 등과 이를 성토·탄핵하여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파면(罷免)시켰다.
그와 이승만의 악연은 해방 후에 나타난다. 그는 1951년 이승만 대통령에게 하야경고문(下野警告文)을 내어 부산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출옥 후 1952년 2·4정치파동 때 국제구락부사건(國際俱部事件)을 주동하여 재차 영어의 몸이 됐다.
상해 임시정부의 광복운동이 침체하자 심산은 1924년부터 북경에서 이회영(李會榮)과 상의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로서 동삼성(東三省) 일대에 한인교포 청장년을 독립군(獨立軍)으로 양성했다.
이어 그의 나이 45세에 이동녕·김구·김원봉(元鳳) 등과 상의, 1차로 의열단(義烈團)의 나석주(錫疇)를 하여금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를 폭파케 했다.
1927년 5월 심산은 병으로 상해 공동조계(共同租界)에 있던 영국인 병원 공제의원(公濟醫院)에 입원 중 일경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4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변호도 공소도 거절한 후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이때 심한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었다.
광복 후인 1946년 그는 전국 유림을 결속시켜 유림재단을 정리한 후 유도회(儒道會)를 조직하고, 유학의 근대적 발전과 육영사업을 목적으로 성균관(成均館)과 성균관대학을 설립했다.
해방 후부터 5·16이 나던 해까지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신탁통치반대, 이승만 정권 반독재투쟁 등 반골 선비정신을 표출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축출되자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民自統) 대표로 추대되어 통일운동에 나섰다. 그는 집 한 칸도 없이 여관과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84살 때인 1962년 서울 중앙의료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 박정희 군사정부의장이 그의 병상을 방문했을 때 그를 외면했다. 그런데도 박정희는 그가 타계하자 조문했다.
일제강점기 때 심산 뿐 아니라 전 가족이 큰 아픔을 겪었다. 장남 환기는 (1909~1927) 16세 때부터 심산과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군자금모집책으로 활동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아 19세 나이로 죽었다. 또 둘째 찬기(1915~1945)는 10대부터 일제 교육에 항거하면서 진주고보 등과 동맹휴업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른 후 중국으로 망명, 항일운동을 하다 해방 후 10월에 중경(重慶)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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