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으로 체감 온도가 급격히 낮아진다. 간절기 겉옷이 필요할 터인데도 자식에게선 소식이 없다. 외로이 옷장에 걸린 자식의 외투를 보며 맘이 짠해진 엄마는 전화를 건다. 수업 중인지 받지 않는다. `옷 가지러 안 와?`문자를 보낸다. 두어 시간 지나도 답이 없다. `두꺼운 옷 갖다 줄까?` 그제야 답이 온다. `걱정 마세요. 좀 춥지만 견딜만해요. 주말에 가지러 갈게요.` 여기서 그치면 좋으련만 몹쓸 모성은 이제 `좀 춥지만`이란 자식의 문자에 자동으로 과민 반응하게 된다. 여간 추워서 그런 말을 한 게 아닐 것이라며 외투 없는 자식의 저녁 시간을 자청해서 자책한다. 그 밤에 외투를 들고 쫓아갈 판이다.
정서적, 객관적으로 평정심을 잃지 않는 아버지는 `별 것도 아닌 일로 주책을 떠`는 이런 모성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견딜 만하다니 주말까지 참으면 될 것이고 그도 아니게 급하면 한 벌 사 입겠지. 다 큰 녀석이 제 앞가림도 못할까봐 걱정이냐고 짐짓 무관심을 가장한 위악을 떤다.
흔히 볼 수 있는 집안 풍경이다. 다정도 병인양이라고 엄마들의 자식 걱정은 끝이 없다. 가만 보면 자식은 심리적, 정서적으로 분리될 준비가 되어 있거나 무덤덤한데 그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은 대개의 경우 부모, 그것도 엄마 쪽이다.
엄마가 노심초사하는 것만큼 자식들은 다급하지 않으며 엄마가 애면글면하는 것만큼 자식들은 힘들지도 않다. 자식은 엄마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빨리 크고 앞서 간다. 뒷북치는 건 엄마 쪽이고 독립 못하는 것도 자식이 아니라 엄마다. 자식의 정서적, 심리적 홀로서기를 막는 가장 큰 적은 엄마 스스로다. 자식에게서 한 발자국도 자유로울 수 없는 엄마, 그게 모성의 속성인 걸 어쩌란 말이냐.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