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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 되어야

김살로메(소설가)
등록일 2013-04-26 00:07 게재일 2013-04-26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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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는 스승 장 그르니에의 철학 에세이 `섬`에 붙여 다음과 같은 헌사를 던진다. `이 책은 끊임없이 나의 내부에 살아 있었고 이십 년이 넘도록 나는 이 책을 읽고 있다. 오늘에 와서도 나는`섬`속에, 혹은 같은 저자의 다른 책들 속에 있는 말들을 마치 나 자신의 것이기나 하듯 쓰고 말하는 일이 종종 있다. - 나 자신에게는 더없이 좋은 행운이었다.`

너무 늦지 않게 그 성찬의 의미에 동참하고자 책을 펴들었다. 웬걸, 처음부터 난공불락이다. 내게 장 그르니에의`섬`은 카뮈의 헌사가 더 나은 책, 카뮈의 헌사로 기억될 책, 카뮈의 헌사가 호들갑스런 책으로 기억되게 생겼다. 암시와 독백으로 가득한 그르니에 식 사유의 독창성은 그야말로 뜬구름 잡기였다. 아무리 카뮈가 말한 대로 `우리들 스스로 좋은 대로 해석하도록`맡기려 해도 속만 더부룩해져올 뿐이다. 소화 안 된 묵직한 배로 뭔가를 더 먹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느낌이랄까.

원문의 난해함 때문인지 번역본은 비문을 쏟아낸다. 아무리 독자의 예를 다하려 해도 부분에 따라선 쓸 데 없이 에너지를 낭비하는 기분이다. 글이 글로서 제 기능만 다해주면 좋으련만 받아들이기 어려운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원문을 구해서 비교하면서 읽고 싶다. 읽기에 껄끄러운 건 번역의 문제이지 원문의 문제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왜냐면 스승의 현학허세나 자기만의 말놀이를 위해 카뮈가 그토록 호들갑을 떨며 헌사를 날렸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군데군데 심오한 철학과 명징한 단상들 덕에 끝까지 읽어낼 수 있었다. 이 책에 대한 고무, 또는 찬양의 독후감들은 이 책 전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처럼 부분적으로 빛나는 사유들에 대한 몫이리라. 남들 다 좋다고 하는 책도 한 번쯤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독자로서 불충한 독해력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섬이 되지 않고서는 장 그르니에의 `섬`을 제대로 이해하긴 어렵다. 섬이 되어야 섬에 닿을 수 있는, 막막하고도 먹먹한 심상을 불러일으키는`섬`.

/김살로메(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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