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만성(大器晩成)은 일반적으로 `큰 그릇은 늦게 완성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박재희 교수는 만(晩)자를 설명하면서 면(免)이라고 쓰인 판본이 많다며, 부정의 뜻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큰 그릇은 완성이 없다`고 해야 정확한 해석이라 했다. 따라서 큰 그릇이란 어떤 틀이나 어디에 고착돼 있지 않기에 부단하게 변화를 하면서 이뤄져 가는 것이다. 이렇게 변화 성장해 가는 모습을 바라볼 때와 소통 없이 과거에 매여 있을 때 주변인들의 시선은 달라진다. 고착된 의식으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통합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천리걸음도 한 걸음부터처럼 지금 변화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는가.
구조분석은 인간의 성격을 세 가지 자아 상태로 설명한다. 부모 또는 부모와 같은 권위적 인물을 모방한 행동·사고·감정을 `부모 자아 상태`라고 한다. 아동기시절부터 재연되고 있는 행동 사고 감정을 어린이 자아 상태라고 하고, 지금-여기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으로서의 행동·사고·감정을 `어른 자아 상태`라고 한다. 이러한 자아 상태의 기능을 분석하면 더욱 다양해지는데, 통제적인 부모(Controling Parent)를 경험했을 수도, 양육적 부모(Nurturing Parent)를 경험했을 수도 있다. 또한 어린 시절에 자유로운 어린이였든가 순응하는 어린이였든가를 살펴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지금의 나는 과거의 부모나 어린 시절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이를 뛰어넘을 수 있기도 하다.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그의 아들 히데타다(秀忠)의 관계를 살펴보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천하가 태평성세에 적합한 인물이 자신의 후계자가 되기를 바라면서 참모들의 의견을 구했다. 그때 문신과 무신의 의견은 달랐다. 문신들은 무예와 지략이 뛰어난 장수 히데야스(秀康)를 추천했지만 무신들은 태평성세에 걸맞게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릴 수 있는 히데타다를 추천했다.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마음이 넓어 반대파까지 포용할 수 있고, 섭정이 가능한 아들 히데타다에게 권좌를 물려주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표면상 은퇴해 슨푸성으로 물러갔지만 참모를 모아 정책을 입안해 에도에서 실행하도록 전달했다. 그렇지만 히데타다는 슨푸에서 전달되는 안건을 실행하며, 새로운 관점을 추가한다. 슨푸의 지시는 원칙이지만 실정에 맞지 않은 부분은 수정하고, 공식적인 문서에는 아버지의 이름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만 사용했다.
현재의 어른 자아가 성장하기 위해 과거에 통제와 비판을 받은 부모의 자아 영향을 뛰어넘고, 어린 시절의 영향을 벗어나는 지혜로움이 필요하다. 히데타다는 아버지를 받아들이되 자신의 이름으로 분명한 잣대를 내세웠다. 참모들과 끊임없이 격의 없이 토의하고 사람의 마음을 끌어들였다. 그는 “부하에게 부려져야 한다”고 했다.
진보니 보수니 하면서 사회적 비용이 많이 들었다. 송호근 교수는 이분법 사회를 넘어서라는 책의 첫 문장으로 “헷갈리죠?”라고 했다. 민주화 이십오 년 동안 만들어진 틀 속에서 이념이 모든 것을 재단했던 시대는 지났다고 했다. 그렇다면 경제를 일구었던 산업화의 시대, 그 속에서 정의를 외치며 이끌었던 민주투사들의 시대, 즉 잃어버린 십칠 년을 더이상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기준을 무엇이어야 할까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리그에서 선출된 사람들의 곁에 누가 있는가 그것도 주목대상이다. “결정적 순간 당신 옆에는 누가 있는가”라는 책에서 최고의 성과를 올리는 협력을 설명하고 있다. 홀로 완전한 인간이 없기에 상호보완 할 수 있는 다양한 파트너가 필요하다. 또한 공동의 목표의식으로 일관성 있는 정책을 기대하며 이에 앞서 신뢰와 소통으로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정치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