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가 전국적으로 실시됐다. 대한민국의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2학년 학생 180만여명이 선택의 여지없이 시험을 치뤘다. 마침 교내 학력평가가 22일에 있던 터라 일제고사를 치르고 난 후의 아이들은 기진맥진한 모습이었다. 이제 겨우 초등학교 6학년인데 시험에 질려 누렇게 뜬 얼굴을 보고 있자니 안쓰러워 한 마디 툭 던졌다. “시험 보느라 고생 했으니 너희 하고 싶은 걸 하게 해주마” 그랬더니 기다렸다는 듯 “놀아요! 밖에 나가서 놀아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맞다. 너희는 숲에서 들판에서 운동장에서 열심히 뛰어 놀아야 할 나이다. 몸이 근질거리고 좀이 쑤시는데 연일 교실에 학원에 죄수처럼 가둬두기만 하니 탈이 날 법도 하다. 학교폭력이니 게임중독이니 각종 정신질환 같은 심각한 문제가 왜 생겨나겠는가? 그것은 잘못된 교육에 있다. 구속과 억압은 일탈과 저항을 낳기 마련이다. 자율과 협동이라는 교육의 큰 새판이 짜 지길 바라지만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니 참으로 요원하다.
근본이 서로 상충하는 창의·인성을 요모조모 따져보지도 않고 온갖 기치에 누덕누덕 갖다 붙이더니 지난해부터는 토론열풍이 불고 있다. 논술광풍으로 몸살을 앓았던 기억이 새삼 떠오르는 걸 보니 토론도 만만치 않을 듯하다. 특히, 디베이트 쪽으로 가닥이 잡히는 걸 보면서 한바탕 떠들썩한 쇼가 벌어질 것 같아 기대(?)가 크다. 몇 년 후에 또 무슨 열풍이 불까? 디지털 교과서? 스마트 교육? 이중 언어? 생각하니 우습다. 교육도 유행을 타니 말이다. 백년지대계라는 말이 어쩌다 이렇게 교육과 멀어졌을까? 사람을 `도구`나 `물건`으로 보는 신자유주의 때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그저 나는 지금까지 해 온 대로 아이들에게 책읽기의 즐거움과 글쓰기 습관을 심어주는데 노력하련다. 가족의 소중함, 친구와 교사와의 유대감을 경험케 하고 좋은 시를 함께 외고 스스로 겪은 바를 시로 쓰도록 도울 생각이다. 그리고 아이들의 생일을 기억해 가능한 한 오래토록 축하의 말을 전하고 싶다. 세상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교육은 변하지 않는 것을 우선해야 하리라. 변하지 않는 가치 이를테면 사랑, 희망, 희생, 양보, 배려, 나눔, 감사, 성실, 자율, 정직 등이 좋은 예다. 일제고사 덕분(?)에 신 나게 아이들과 놀고 와서 밤에 노장을 읽었더니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노장이란 노자와 장자를 함께 이르는 말이다. 노자와 장자는 사람이 자기 본성을 잃고 물화(物化)돼가는 것을 크게 염려했다. 물질은 시간과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존재로 끊임없이 시공간의 제한을 받는다. 따라서 물질은 생멸을 반복하고 그에 대비관계에 있는 것들과 상호의존한다. 사람이 물질을 추구하면 할수록 그것에 의존하고 속박 당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앞서 언급한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중에 물질은 참으로 쉽게 변하는 것이다.
노장은 말한다. 사람은 물질에 속박당해서는 안 되며 물질을 제어할 수 있는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고. 물질문명에 파묻혀 사는 우리로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한다. 물질만능주의와 이기주의에 물든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얼마나 끔찍할지를. “너는 너의 마음을 담박하게 하고 너의 기를 고요하게 하여, 사물의 자연스러운 본성에 따르되 사사로운 마음을 버려라. 그러면 세상은 평화로운 것이다” 때와 먼지가 끼고 오염된 마음을 사심(私心)이라고 한다면 그런 마음을 정화하여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것은 허심(虛心)이라고 한다. 장자는 이런 마음으로 사물의 자연스러운 성향을 따를 것을 주장하며, 그 유명한 포정해우(包丁解牛)를 예로 들었다. 노장을 읽는 밤은 이상하리만치 심난하다.